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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연습] 12. 삶 속의 죽음, 죽음 속의 삶


<철학하는 일상>의 저자 이경신님의 새 연재 ‘죽음연습’. 필자는 의료화된 사회에서 '좋은 죽음'이 가능한지 탐색 중이며, 잘 늙고 잘 죽는 것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삶 속의 죽음, 죽음 속의 삶"

프랑스의 작가 미셸 투르니에는 <외면일기(현대문학, 2003)>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내 건강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다. 그저 내 속에 죽음이 들어 앉아 있을 뿐이다. 나는 그 죽음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
 
우리 대부분은 이 작가처럼 내 속의 죽음의 존재를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가 건강할 때조차 우리 몸의 일부는 지속적으로 죽어간다. 이 사실을 주목한다면, 우리 속에 죽음이 들어앉아 있다는 것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를 살아있게 만드는 ‘세포의 자살’
 
우리 몸의 일부가 죽는다는 표현은 좀 더 엄밀해질 필요가 있다. 우리의 몸을 구성하는 수많은 세포 가운데 일부가 사라진다는 것이 더 적확한 표현이다. 수많은 세포로 이루어진 우리 인간은 탄생하는 순간부터 죽음을 맞는 순간까지 세포들을 지속적으로 잃으면서 새로운 세포들을 계속해서 얻어 나간다. 개별생명체인 우리를 형성하는 이 세포들은 단 한순간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세포들로 이루어진 우리 몸은 멈추지 않고 흐르는 강물과 닮았다. 우리가 ‘한강’이라 부르는 강도 알고 보면 단 한 번도 같은 강이었던 적은 없다. 강물은 쉴 새 없이 흘러가기 때문이다. 나라는 생명체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에 태어나 단 한 번도 같은 나였던 적은 없다. 내 몸을 구성하는 세포들이 끊임없이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세포의 일부는 계속해서 죽어간다. 대신, 새로운 세포가 지속적으로 다시 생겨난다.
 
무엇보다 우리의 삶, 우리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세포는 제때 스스로 죽지 않으면 안 된다. 프랑스의 생물학자 장-끌로드 아마이센(Jean-Claude Ameisen)은 이 ‘세포의 자살’이 우리 몸을 만들어가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한다. 우리의 두뇌, 팔과 다리 같은 몸의 부분들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도 세포들은 제 목숨을 끊어야 한다.
 
세포의 자살을 통해서만이 우리 몸의 안과 밖이 형성될 수 있다. 세포가 필요한 순간 죽지 않는다면 우리는 소위 정상적인 몸을 가질 수 없다. 게다가 암세포처럼 죽음을 거부하고 증식을 계속하려 한다면, 그래서 영원히 살고자 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다.
 
반대로 세포가 계속 죽어버린다면, 역시 개별 생명체는 생명을 유지할 수가 없다. 그래서 세포들이 주변 환경에 맞추어 죽음을 조절한다. 때로는 죽음을 억제하고 때로는 죽음을 유발시킨다. 뿐만 아니라 일부의 세포들이 죽어가는 동안 새로운 세포들이 생겨나 그 자리를 메운다.
 
그렇다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그리고 내일의 나는 똑같은 내가 아니다. 나를, 내 몸을 항상 변함없는 정해진 존재로 여기는 것은 착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은 고정불변의 영원히 정지된 존재가 아니라 계속해서 재생산되는 변화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세포의 탄생과 죽음이 지속적으로 균형을 잡을 수 있을 때 우리의 삶도 계속될 수 있다.
 
세포의 자기 파괴와 재생산의 균형 없이는 우리 삶이 지속될 수 없다는 점에서 삶은 죽음과 극적으로 대립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삶 속에 죽음이 있고, ‘삶과 죽음의 대화’ 덕분에 우리 삶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래 전 누군가가 이야기했듯이,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에서조차 죽어간다”는 말이 틀리지 않다. 개체의 차원에서는 탄생이 죽음과 정반대편에 있는 듯 보이지만, 세포의 차원에서 보면, 죽음은 우리가 탄생하는 순간에 이미 함께하고 있으니 말이다.
 
뇌사,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그런데 삶 속에 죽음이 존재하는 것만큼이나 오늘날 현대인의 죽음 속에는 삶이 존재한다고 말하면 지나칠까?
 
‘뇌사’를 한번 들여다보자. ‘한 생명체의 마지막 세포가 죽을 때 그 개체를 죽은 것’으로 간주하는 생물학적 죽음의 정의는 ‘뇌가 죽으면 심장이 살아 있어도 죽은 것’으로 보는 현대 의학의 죽음의 정의 앞에 무색해진다.
 
뇌사는 현대의료기술의 발달, 즉 심폐소생술과 장기이식술의 등장과 깊은 관련이 있다. 심폐소생술이 뇌사를 가능하게 만들었고, 뇌사를 인정함으로써 장기이식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신체에 이식할 장기를 적출하기 위해서는 인간 개체에 대한 죽음에 대한 새로운 정의, 즉 뇌사의 승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수밖에 없다. 이제 소생술 전문의가 뇌파측정, 뇌혈류조영술과 같은 현대의학의 첨단기술의 도움을 받아 죽음을 판정하는 자로 등장한다.
 
장기이식을 가능하게 하는 뇌사자의 몸은 (의학적으로) 죽었지만, (생물학적으로) 죽지 않은 신체이다. 이식에 필요한 장기는 죽어서는 안 되고, 그 장기를 소유한 개체는 죽어야 한다. 뇌가 죽었으니 개체는 죽은 것으로 간주되지만, 그의 심장, 혈액순환은 인공적으로 유지되어 이식에 필요한 부위의 세포들은 계속해서 살아 있어야 한다.
 
그래서 뇌사상태인 사람은 생물학적으로 죽은 시체와 달리 죽은 존재로 머물지만, 여전히 살아 있는 세포를 품고 있는 자다. 살아있으되 살아있지 않고, 죽었으되 죽지 않은 존재가 바로 뇌사자인 것이다.
 
사람들은 혼란스럽다. 연구 조사에 의하면, 상당수의 의사들도 마찬가지다. 다들 뇌사로 판정된 사람이 죽었다고 믿기가 어려운 것이다. 생물학적으로는 완전히 죽지 않았으니까, 그 믿음이 완전히 그릇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뇌사자는 죽은 자이다. 아니, 오히려 죽음 속에 삶을 품고 있는 자이다.
 
죽음이 뇌사로 정의되는 순간, 죽음의 순간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무의미해졌다. 의학기술의 발달이 죽음의 순간 자체를 뒤흔들어 놓았으니까. 그래서 어떤 이들은 현대인의 죽음을 ‘순간’이 아니라 ‘과정’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소생술이라는 놀라운 의료기술이 인간의 몸을 삶과 죽음의 중간 지점에 머물게 하는 데 성공한 이래, 그 어느 때보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삶의 종지부를 찍는 죽음의 순간, 절대적인 죽음의 순간이 아니라, 삶을, 생명을 품은 죽음에 익숙해져야 하는 시대에 이미 들어섰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그런 죽음이 낯설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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