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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연습] 10. 죽음에 대한 공포


<철학하는 일상>의 저자 이경신님의 새 연재 ‘죽음연습’. 필자는 의료화된 사회에서 '좋은 죽음'이 가능한지 탐색 중이며, 잘 늙고 잘 죽는 것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인간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다. 그것이 죽는 순간의 고통에 대한 것이건, 자기 존재의 소멸에 대한 것이건, 대개는 죽음을 떠올리면 감당하기 힘든 공포의 무게로 짓눌려지는 듯하다.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까닭은 죽어가는 동안의 괴로움, 죽는 순간의 고통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내 육신이나 영혼이 사라진다는 생각은 오히려 무서움보다는 어떤 현기증을 불러일으킨다. 이 세상에서 나란 존재가 영원히 증발된다는 상상을 해보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어지러움으로 속이 울렁거리는 것이다.
 
죽음 이후에 대한 상상  

▲ 중세 유럽에서 제작된 것으로 전해지는 "죽음의 무도". 작자 미상.

 
어떤 사람들은 죽음을 잠과 같은 휴식으로 여겨 환영하기도 한다. 피로하고 힘들었던 하루를 마감하고 편안한 잠자리에 들 듯, 죽음은 힘든 인생 다음에 오는 잠과 같은 휴식, 무엇보다도 영원한 휴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한 영국인 작가는 죽음을 ‘다정하지만 엄격한 유모’에 비유했다. 시간이 되면 잠자기 싫어하는 아이를 달래서 편안한 잠의 세계로 인도하는 유모처럼 죽음도 때가 되면 아무리 우리가 죽음을 거부한다고 해도 고달픈 삶에 지친 우리에게 진정으로 평화와 안식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보았다. 그렇다면 죽음이야말로 우리가 기다리고 바라던 것, 아니 진심으로 바라야 할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죽음이 과연 잠과 같은 것일지, 소설 속 주인공처럼 여전히 반문해 볼 수 있다.
 
“죽음이란, 잠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상황이 아닐까. 그것은 어쩌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 같은 끝이 없고 깊은 깨어 있는 어둠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이란 그런 암흑 속에서 영원히 각성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무라카미 하루키의 <TV피플>(삼문,1996) 중에서)”
 
<영혼의 부정>이라는 책에서 스캇 펙도 이와 유사한 상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텅 비어 있는,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식하며 존재한다는’ 이상한 환상이 그것이다.
 
그에 의하면, 죽음 이후에 대한 이러한 상상은 우주를 여행하던 우주인이 사고를 당해 우주선으로부터 분리되어 우주 공간을 떠다니는 절대적으로 고독한 상태, 다시 말해서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영원히 그렇게 존재하도록 운명 지어진 상태에 대한 끔찍한 상상이다.
 
그는 죽음을 무서워하는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자기 존재의 영원한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라기보다 자의식의 영원한 각성상태에 대한 두려움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죽음이 영원히 잠드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이라면 분명 두려워할 만하다. 그러나 죽음이 영원히 평화롭게 잠든 상태인지, 죽음 이후에도 인간 개인의 자의식이 깨어 있는 것이지 확인할 길은 없다.
 
죽은 몸이 안식하지 못한다면
 
이처럼 죽은 다음에도 자의식, 자기 영혼이 영원히 깨어 있을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지만, 자신의 죽은 몸이 편안함과 고요함을 찾지 못할까봐 염려하는 사람도 있다.
 
“죽은 뒤에 내 두개골이 선반 위에 놓여져 부젓가락으로 통통 두드려지는 건 아무래도 탐탁지 않다. 죽은 뒤에 내 몸 속에서 무엇인가를 끄집어낸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몹시 우울하다.(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문학사상사, 1996) 중에서”
 
죽은 다음 육신이 어떻게 되건 무슨 상관일까? 하지만 정말 상관없는 일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도 죽음 후의 내 육신이 평화롭지 못할까봐 걱정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시신이 제대로 썩어 흙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미라로 변해 후세대에게 발견된다면 어떡하지?  미라가 된 몸이 전시되어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된다면 어떡하지?’하고.
 
나는 내 죽은 몸이 조용히 흙으로 돌아가길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화장(火葬)을 원하는 것에는 이런 무의식적인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죽음에 무관심해던가, 아니면 친해지던가
 
죽음이 두려운 까닭도 다양하지만, 죽음의 두려움을 걷어내는 법도 다양하다.
 
오래 전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을 향해 죽음을 두려워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고 단언했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삶만 있을 뿐 죽음은 없고, 죽은 다음에는 이미 죽었는데 죽음을 두려워할 일이 뭐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죽음이 아무 것도 아니고, 죽음 이후에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죽음에 관심을 둘 이유도, 신경 쓸 필요도 없다. 다만, 죽음의 어두운 그늘을 걷어내고 주어진 삶을 향유하는 일만 남아 있을 뿐이다.
 
하지만 철학자의 이런 논리는 사람들을 충분히 사로잡지도 설득하지도 못한 것 같다. 죽음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그의 대답은 죽어가는 동안의 힘겨움도, 죽는 순간의 고통도 해결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죽음 이후에 대한 불안을 충분히 해소시켜 주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죽음에 무관심해지기 어려운 사람은 어떤 영국인처럼 날마다 관 속에서 잠을 청하면서 끔찍한 죽음에 익숙해지려 애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기괴한 노력도 그다지 죽음의 두려움을 누그러뜨리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죽지 않는 이상 어떻게 죽음을 알 수 있겠는가. 살아 있는 한 죽음은 항상 낯설기만 할 뿐, 도저히 가까워지기 쉽지 않은 것이다.
 
이 세상보다 멋진 ‘저 세상’이 주는 위안
 
죽음에 무관심하기도, 친숙해지기도 어려운 대다수의 사람에게는 차라리 신화적이고 종교적 믿음이 더 의지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 죽음 저편에 아무 것도 없는 것보다 천국이나 극락 같은 멋진 사후 세계가 있는 편이 이들에게 더 위안이 되고 안도감을 주나 보다. 이곳의 삶이 끝이 나더라도 삶이 완전히 끝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세상에서 또 다른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이런 생각이라면, 죽음이란 단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이동하기 위한 통과의례일 뿐이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선하게 살았다면 죽은 다음에도 여전히 희망이 있다고 역설한다. 이 낙관적인 철학자는 사람이 죽으면 다이몬(인간과 신의 중간존재)의 인도를 받아 배를 타고 아케론 강을 건너 저 세상에 도달한다고 믿는다. 그는 저 세상이 이 세상보다 더 나은 곳이라 확신한다. 저 세상이야말로 이 세상보다 더 아름답고 더 풍요하고 신과도 사귈 수 있는 곳이란다.
 
인디언 오지브웨이 족도 소크라테스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 이들은 사람이 죽으면 서쪽을 향해 여행을 떠나는데, 걷다 보면 깊고 물살이 빠른 강에 도달한다고 생각했다. 그 강에 놓인 침수교를 무사히 건너면 이 세상보다 더 아름답고 풍요한 세상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저 세상에서는 조상과 친척, 가족을 모두 만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런 천국의 땅에 들어가려면 그럴만한 자격이 있어야 한다고 못 박는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죽음의 신화는 닮은 점들이 있다. 피안의 세계가 있다는 것, 그 세계에 가기 위해서는 강을 건너야 한다는 것, 저 세상은 이 세상보다 더 아름답고 풍요하다는 것, 그 세상에 가기 위해서는 어떤 자격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곳에서 죽은 가족,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 등.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여러 날이 흘렀을 때였다. 아버지가 꿈에 나와서는 내게 ‘나는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어. 그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나오려면 강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야 해.’라고 말했던 것이 떠오른다. 내 꿈 역시 그동안 들어왔던 죽음의 신화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이 꿈을 꾸고 나서 위로를 받았던 것을 생각한다면, 내세에 대한 신화적 믿음이 죽음의 슬픔, 두려움을 견뎌내게 하는 데 도움이 안 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지금보다 더 멋진 세상에서 살기 위해 죽어야 한다면, 죽음이 뭐가 두려울까? 하지만 그런 세상이 사후에 존재할 것인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사실이 유감스럽기만 하다.
 
또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사후 세계의 존재에 대한 집착이나 영원회귀를 통한 윤회에 대한 갈망도 모두 생명을 유지·연장하려고 애쓰는 인간들의 현세 삶에 대한 욕망의 또 다른 표현은 아닌지 궁금하다. 죽음이 두려워서 오래 살고 싶은 것이지, 아니면 오래 살고 싶어서 죽음이 두려운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사실, 어느 날 우주 속에 불쑥 등장한 생명체가 언젠가 사라질 운명을 가진다고 해서 안타까울 것은 없다. 나는 죽음 이후를 그냥 괄호 속에 넣어두기로 했다. 그럼에도 괄호 밖으로 튀어나오는 생각의 파편이 있다. ‘죽으면 끝’이라는 것, 죽은 다음 내 영혼의 자의식 따위는 보존되지 않을 것이라는 주관적 믿음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사후세계만큼이나 유혹적인 공상, 또 다른 존재로 이 땅에 다시 태어난다는 생각을 완전히 접지는 못했다. 아니, 꼭 접을 필요가 있을까 싶다. 지금 생보다 더 나은 삶, 즉 더 행복한 삶, 더 성숙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고 상상하다 보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조차 잠시 잊는다.
 
나는 가끔, 엉뚱하게도 윤회를 꿈꾼다.  (이경신)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만화 <두 여자와 두 냥이의 귀촌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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