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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되지 않은 역사] 사할린 한인의 영주귀국과정②  

 


75년전, 일제에 의해 강제이주 당하고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할린 한인의 역사와 삶, 그리고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를 짚어보는 “기록되지 않은 역사” 기사를 연재합니다. 최상구님은 지구촌동포연대(KIN) 회원으로 사할린 한인 묘지조사 후속작업, 영주귀국자 인터뷰 등 ‘사할린 희망캠페인단’ 활동을 펴오고 있습니다. - www.ildaro.com
 
영주귀국의 물꼬, ‘귀환 청구소송’이 시작되다
 

▲ 화태귀환 재일한국인회의 활동노트.  내용 출처: 2012년 국가기록원 전시회 
 
사할린과 일본, 그리고 한국을 잇는 서신을 왕래하고 한국, 소련, 일본 정부와 적십자를 상대로 탄원을 하며 전개된 ‘화태귀환 재일한국인회’의 귀환운동은 1975년 다카키 겐이치 변호사에 의해 청구소송으로 발전한다.
 
다카키 변호사는 ‘재 사할린 한국인 귀환 변호인단’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1975년 12월 사할린 코르사코프에 거주하는 엄수갑씨 등 4명이 일본 국가를 상대로 <사할린 잔류자 귀환 청구소송>을 동경지방재판소에 제소하였다.
 
이 재판은 사할린 한인들이 ‘일본에 귀환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한인들이 일본의 강제동원으로 사할린에 가게 되었기 때문에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귀환시킬 의무가 있으며, 일본이 비준한 국제인권규약(사회권 규약)에서 ‘자국에 돌아갈 권리’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소송은 14년간 지속되면서 ‘사할린 재판 실행위원회’가 결성되어 재판을 홍보하고 대국민 호소, 다큐멘터리 제작 등 여론 형성에 많은 역할을 했다. 그리고 1983년 4월 오오누마 야스아키 교수와 변호사들을 중심으로 <아시아에 대한 전후 책임 연구회>가 결성되는 성과를 얻었다.
 
사할린 한인들이 일본에서 가족과 재회하고, 한국으로 일시 모국방문이 이루어지고, 한국으로 영주 귀국하기 위한 논의를 한일 정부가 본격화하자, 1989년 6월 소송은 취하되었다. 14년간의 과정에서 비록 일본 정부의 귀환 책임을 끝까지 묻지 못했지만, 다양한 증언과 자료를 발굴하였고 여론을 환기시켰으며, 일본 정부에 압박을 가하는 등 사할린 한인 귀환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민간의 귀환운동에서 일본의 ‘정치적 쟁점’으로
 
1987년 7월 17일, 일본 국회의원들을 중심으로 <사할린 잔류 한국∙조선인 문제 의원간담회>(일본 국회의원 155명 참여)가 발족되었다. 일-소 원탁회의의 일본 측 의장 하라 붐베에가 회장을, 일본 사회당의 이가라시 고조가 사무국장을 맡았다. 하라 붐베에는 대소련 관계에 있어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고, 이가라시는 북한과 관계가 있는 인물이었다.
 
의원 간담회는 고르바쵸프 서기장에 서신을 발송하고, 모스크바를 방문해 관련 부서의 관료들과 회담하였다. 출입국 간소화와 소련적십자사를 통한 한인들의 생사 확인, 일본에서의 가족 재회를 확대하기 위한 소련적십자사와 일본적십자사 간 협력을 요청하였다. 사할린 귀환운동이 민간 차원을 넘어 적십자사와 정부 간의 외교 의제로 격상된 것이다.
 
이런 배경 속에 1988년 4월 일본 외상은 사할린에 잔류한 한인에 대해 일본이 도의적 책임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1988년 사할린 잔류한인 문제 해결을 내걸고 일본 국회의원 대표단이 소련에 공식 첫 방문을 하게 된다.
 
이 방문을 통해 사할린 한인들의 가족 재회를 일본이 아닌 한국에서 직접 이루어지게 하는 방식을 제기하였고, 이 문제를 일본 정부의 책임하에 한∙일 적십자사가 다루어, 정치적인 이용은 없을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소련 측은 한인들이 일본을 경유하여 한국에 일시 방문하는 것은 묵인하였지만, 한국으로 영주 귀국하는 것에 대해서는 답변하지 않았다.
 
변화의 바람: 페레스트로이카, 서울올림픽, 한국의 북방외교
 

▲ 일본에서 가족재회를 위한 초청절차. 내용 출처: 2012년 국가기록원 전시회  ©일다  
 
일본의 움직임과 함께 1985년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선언하고, 1988년에 서울에서 올림픽이 개최되면서, 한인들의 영주 귀국에 보다 유리한 조건이 형성된다. 페레스트로이카는 오지 사할린에도 영향을 미쳤다. 북한과의 관계를 고집하던 입장에서 소련 정부와 사할린 주 정부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일본에서의 가족 재회가 1985년 이후 급격히 증가하였다. 그간 간헐적으로 고령의 독신자에 대해서만 영주 귀국을 허가했던 입장에서, 1989년 엄주정씨 일가(딸 부부, 아들 부부, 손자 4명) 전원에 대해 허가하는 등 영주 귀국에 별다른 제한을 두지 않겠다는 방침으로 바뀐 것이다.
 
한편 서울올림픽에 동구권 나라들이 대거 참가하는 등, 올림픽을 계기로 한국의 실상을 잘 알지 못했던 소련인들과 사할린 한인들은 커다란 인식의 변화를 갖는다. 사할린 한인들이 입을 모아 얘기하듯, 올림픽은 사할린의 소련인들에게 한국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또 이를 통해 사할린 한인들 스스로도 한민족이라는 정체성과 자부심을 회복하게 되었다.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한국과 동구권 국가들의 수교가 진행되고, 1990년 소련과의 수교가 이루어졌다. 한국 정부의 ‘북방외교’는 그동안 불가능했던 직접적인 교류를 할 수 있게 했다. 하바롭스크까지 정기 항공노선이 만들어졌고, 사할린 한인들은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었던 ‘고향으로의 귀향’을 두려움 없이 행동으로 옮길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89년 사할린주 이산가족회와 1990년 사할린주 한인 노인회가 결성되어, 한인들의 모국 방문과 영주 귀국의 업무를 담당하게 된다.
 
마침내 고향 땅을 밟은 사람들
 
한국에서는 국회의원으로서 처음으로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가 사할린을 방문해 고령의 한인에 대하여 영주 귀국을 논의하였다. 점차 한국에서도 영주 귀국 논의가 활발해져, 마침내 1989년 7월 한일 양국 적십자사로 구성된 <사할린 거주 한국인 지원 공동사업체>가 만들어져 모국 방문(일시 방문과 영주 귀국) 문제를 전담하게 되었다.
 
공동사업체는 1989년 12월 한인 23명이 일본을 경유하여 한국을 방문하는 것을 시작으로 이후 전세기 편으로 두 번의 일시 귀국 사업을 추진하였다.
 
1990년 한∙소 수교에 따라 왕래가 보다 자유롭게 되자, 한국 정부는 ‘사할린 교포 영주 귀국 업무처리 지침’을 제정하는 등 영주 귀국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당시 영주 귀국의 조건은 한국 내 친족이 생존해있어야 하고,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경제력이 있는 친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상자를 사할린 거주 징용1세 및 1927년생 독신자로 제한했다. 소련 본토 거주자 경우에는, 사할린에 강제징용 된 증명이 별도로 필요했다.
 
이에 대해 사할린 주 한인협회와 이산가족회는 한국에 연고가 없는 동포들의 귀환에 대해 건의하였다. 광림교회에서 경영하는 ‘사랑의 집’에서 수용 의사를 밝혀, 1992년에 전세기 편으로 독신자 77명, 1993년에 42명의 고령 무연고자들이 춘천 사랑의 집으로 집단 영주 귀국하였다.
 
1992년 한국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함께 사할린 한인 문제 해결을 일본 정부에 공식 요구하기로 하고 피해 배상을 위한 특별대책반을 구성했다. 그리고 무국적 사할린 한인들이 한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도록 러시아 연방 측에 협조 요청을 계획하였다. 또 무연고 동포들의 귀국 후 생활터전을 마련하는 데에 정부 예산을 반영하는 방안을 검토하였다. 한일 양정부가 이 문제를 정식 외교 문제로 다루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일본에서 비(非)자민당 연립정권이 출범하였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다. 의원간담회의 이가라시 사무국장과 하토야마 유키오 사무국차장 등 과거사 문제를 푸는 데에 있어 의지가 강한 인사들이 입각하였다. 호소카와 수상은 취임 연설에서 “제2차대전은 침략전쟁이며 잘못된 전쟁으로 인식하고 있다. (…) 과거 역사에 대한 반성과 분명한 매듭을 짓고 평화와 국제협조를 위해 책임을 다해 나갈 생각”이라고 언급했다.
 
이는 구체적인 성과로 이어졌다. 1993년 한일 외무회담에서 사할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무협의회를 구성하는 것에 합의하고, 실무협의회를 통하여 양국 공동으로 사할린 거주 한인에 대한 실태조사를 벌여 이를 근거로 필요한 예산과 귀국대상자의 범위와 기준을 마련하기로 하였다.
 
그 해 11월 한일 정상회담에서 호소카와 총리는 과거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의 뜻을 밝히고, 그 일환으로 사할린 한인의 영주 귀국 문제를 해결하는데 지원책을 확대하기로 약속하였다.
 
사할린 한인의 귀환을 지연시키는 한국의 정치
 

▲ 사할린 재판 소송 원고 엄수갑씨의 묘.(사할린에서 사망)  사진: 2012년 국가기록원 전시회       
 
한국 정부는 영주 귀국 희망자의 귀국과 정착에 따른 비용과, 사할린에 잔류하길 희망하는 사람에 대한 일정액의 보상금을 지급한다는 내용을 기본 모토로 하여, 일본 정부 측에 필요한 재원을 부담하도록 할 것을 구상하였다.
 
한국은 귀국을 희망하는 사람이면 모두 받아들이겠다는 입장이었다. 1993년 6월 러시아를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의 언급에서도 드러난다. 김영삼 대통령은 사할린 한인 문제에 관한 질문을 받고 “한국 행을 원하는 사람은 전원 다 데려올 생각이다. 인도적 입장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사할린 한인의 귀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1994년 영주귀국자를 위한 주택과 요양시설을 짓는데 필요한 부지는 한국 정부가 제공하고, 건설 비용과 정착지원금은 일본 정부가 제공한다는데 원칙적으로 합의하여, 일본에서는 예산 편성까지 마쳤다. 그런데 정작 한국 정부의 부지 선정이 지연되어 결국 안산의 고향마을은 2000년에야 입주할 수 있었다.
 
국내 귀국을 희망하는 대부분의 사할린 한인들이 고령인 점을 감안한다면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한국 정부는 영주 귀국 사업의 재원 대부분을 일본에 의지하게 되어, 일본의 태도 변화에 따라 영주 귀국 사업이 흔들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최상구)

[참고 문헌]
-강정하 “사할린 잔류 한인의 영주귀국을 둘러싼 한-일-러 교섭과정 연구” 한림대 국제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1.
-김성종 “정책옹호연합모형을 통한 정책변동과정 분석: 사할린 동포 영주귀국 사례” 한국 동북아논총 제 53집, 2009.
-정근식, 염미경 “사할린 한인의 역사적 경험과 귀환문제” 한국사회학회 후기사회학대회 발표문, 1999.
-한혜인 “사할린 한인 귀환을 둘러싼 배제와 포섭의 정치” 한국사학회, 2011.
 
[관련 사이트]
-새고려신문 http://cafe.naver.com/sekoreasinmun
-사할린 희망캠페인 http://www.sahallin.net  (https://www.facebook.com/#!/sahhope)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만화 <두 여자와 두 냥이의 귀촌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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