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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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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페미니즘> 사람이 주는 기쁨을 깨닫게 한 여성주의 

 
[창간 10주년 기획 “나의 페미니즘”. 현재를 살아가는 다양한 개인들이 경험으로 여성주의를 기록하고, 그 의미를 독자들과 공유하며 대안담론을 만듭니다. 석은지씨는 아동발달센터에서 특수교사로 일하며 아동상담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나의 페미니즘” 연재는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의 지원을 받습니다. www.ildaro.com]
 
‘잡년행진’에 참여하다
 
이 글을 쓰면서 비로소 깨달았다. 나의 페미니즘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 이유를. 왜 그렇게 막연하고 암담했는지, 그럼에도 쓰고 싶었는지.
 
나는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은 강했지만, 내 이야기가, 나란 사람이, 누구에게라도 받아들여지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이 컸다. 28살에 미대 편입을 하고 내 작업을 흥미롭게 바라봐준 강사님을 만나 그 두려움을 잠식시켰던 때, 다시 회사에 출근을 했다. 대출을 받아 학비를 해결한다 하더라도 생활비와 작업비를 아르바이트만으로 해결하기가 어려웠다. ‘딱 1년만 돈을 벌어 복학하자'며 일을 시작했지만, 계획을 지키지 못하고 직장 생활을 이어가던 중이었다. 그렇게 지지부진한 시간이 3년째 지속되던 2011년, 이 시간을 끝내고 싶다는 간절함이 커졌다.
 
그 무렵 트위터에서 명동 재개발 철거 투쟁 현장인 마리에서 용역 침탈에 대비해 밤샐 사람과 ‘잡년행진’에 참여할 사람을 구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잡년행진’은 “성폭력의 피해자가 되지 않으려면 여성은 헤픈 여자(Slut) 같은 옷차림을 피해야 한다”는 캐나다 경찰의 발언으로 촉발된 ‘슬럿워크’(Slut Walk) 시위의 한국판이다. 성범죄의 원인을 여성의 탓으로 돌리고 여성의 몸에 통제를 가하는 사회에 저항하는 운동인 ‘슬럿워크’(Slut Walk)는 캐나다 토론토에서 처음 시작되어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한국에서도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자발적으로 모인 여성들이 참여해 “잡년 행진”이란 이름으로 진행되었다.
 
축 늘어진 몸을 끌고 밤을 새러 난생 처음 ‘투쟁현장’을 찾고 그 곳에서 잡년행진을 준비했던 건 무기력한 시간을 중단할 계기가 필요해서였다.
 
여성주의를 접한 계기, 숨겨진 또 다른 이유
 
마리에서 회의를 진행하고 퍼포먼스를 연습하며 이런저런 준비를 하였다. 당시 언론에서 보여준 관심을 증명이라도 하듯 꽤 많은 기자들이 취재해 기사가 나오던 때, 며칠을 그곳에서 우리의 회의 작업에 동참하며 바라본 기자분이 나에게 여성학을 접한 계기와 잡년행진에 참여한 이유를 물었다.
 
특수교육을 전공하던 어느 날, 나는 장애인과 관련된 단어로 인터넷 검색을 하다 우연히 여성주의 저널 <일다>를 알게 되었다. 페미니즘에 관해서는 어떤 편견조차 갖고 있지 않을 정도로 그야말로 ‘무지’했는데, 이 매체에서 이야기하는 ‘여성'장애인에 대한 이야기가 새로웠다.
 
특수교육을 공부하면서 느낀 소수자 문제에 대한 관심으로 여성학을 바라보았다. 졸업 후에 특수교사로 아이들을 만나며 내가 아는 페미니즘을 실천하려고 부단히도 노력했다. 처음에 만난 8명의 아이들 중에서 소위 말하는 ‘정상가족’군은 두 명밖에 없었다. 한명이라도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려고 수업 내내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모른다.
 
그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인지 일하느라 바쁘다고 방치되기 일쑤인 아이들이, 다른 무엇도 아닌 존중을 받은 경험만으로도 변하는 모습을 목격했고, 반의 분위기가 예전과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들이 하나같이 활짝 웃으며 통통 튀고 동동 떠다녔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여성주의가 내게 준 것들이 기뻤고 내가 여성주의자라는 게 좋았다.
 
여기까지가 내가 아는 나의 이야기인데, 그 날, 기자의 질문에 내 입에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툭 튀어 나왔다. 말을 하는 내가 구경꾼이 되어 내 이야기를 듣는 심정이었다.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고, 스스로도 마주하기 어려워 억누르기만 했던 이야기였다. 게다가 나의 여성주의 안에 이 이야기가 들어갈 거라곤 그전엔 전혀 생각지 못했었다.
 
따돌림의 기억, ‘내가 나인 게 창피했던’ 시간들 

▲ 학교에서 당한 따돌림은 자존감에 깊은 상처를 입혔고, 사회적으로 '옳은' 기준에 맞춰 나와 세상을 판단하고 구별하는 태도에 길들게 했다.   그림은 시로의 '학교' (출처: 일다-시로의 방) 
 
초등학교 때 시골에서 대구로 이사를 갔다. 전학을 했고 학교에서 따돌림을 겪었다. 시골아이 같은 모습이 문제였을까. 같은 반 아이들이 나를 힐끔 쳐다보며 수군대기 일쑤였고 농담의 소재가 되어 아이들이 낄낄거리고 웃는 소리를 들었다.
 
점심시간엔 혼자 밥을 먹었고 그저 시간을 ‘견뎠다’. 초등학교 시절 일들은 대부분 기억에서 희미해졌다. 그러나 교실 어느 곳에도 내가 앉을 자리가 없어 울고 싶은데 꾹 참고 있던 장면과 그 때의 마음이 또렷하게 남아있다. 따돌림은 오랜 시간 나의 일부로 존재했다. ‘나는 따돌림을 받을 수밖에 없는 아이다.' 내가 그런 아이인거지 쟤들이 하는 행동이 잘못된 거라는 생각을 못했다.
 
스물 중반 즈음, 누가 내게 여성학이 뭐냐고 물으면, 벨 훅스가 《행복한 페미니즘》에서 말한 “우리는 한마디로 가지각색이었다."가 떠올랐다. 책을 읽다 이 문장을 접하던 날, 꽤나 충격을 받았다. 나는 못나서 따돌림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아이인데, 성인이 되어서도 이 감정이 덮치면 무력하기만 했는데, 처음으로 다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날이었다.
 
여성학은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고 말하면서, 겉은 태연했지만 속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처음으로 입 밖으로 꺼낸 말이기도 했지만, 물컹한 감촉을 느끼며 따돌림을 당한 일을 바라보고, 나란 사람과 그 일을 구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일을 겪은 내가 더 이상 부끄럽지 않다고 느꼈다.
 
일하며 많은 아이들을 만나면서, 스스로를 돌이켜볼 수 있었다. 나는 꽤나 도움이 필요했던 아이였다. 어린 시절의 나는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과 커튼이 귀신으로 보여 시시때때로 심장이 내려앉곤 했다. 가끔씩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심장 부근이 너무 아팠다. 귀신이 너무 무서워, 이불을 꽁꽁 싸매고 땀을 뻘뻘 흘리며 밤을 견뎠다. 도깨비가 동생을 잡아갈지도 몰라, 동생 손을 꼬옥 잡고 잠들곤 했다. 우체부 아저씨나 부모님 친구라도 집에 오면 문을 꼭 닫고 동생을 먼저 이불안에 숨기고 나도 숨었다. 이랬던 어린 내가, 받고 싶었던 모습으로 아이들을 대하면서, 단 한명이라도 내 마음을 알아준 어른이 주변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
 
이런 일상은 친척들이 오는 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일 년에 몇 번 친척들이 오는 날이면 두 살 터울인 세 자매는 나란히 서서 인사를 했고, 아무렇지 않게 어른들이 말을 툭툭 내뱉곤 했다. 다섯 살 무렵이었나. 항상 셋 중에서 가장 느리고 뒤쳐진 아이로 어른들의 말에 오르내리며, 언니와 동생 사이에서 꼼짝없이 비교 당했다. 친척들이 올 때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날이었다. 그 무렵 들었던, 얘는 바보 아니냐, 란 말이 마음에 콕 박혔다. 차라리 어른들은 나쁘다고 여기고 미워했다면 어땠을까. 나는 바보고 내가 바보인건 너무 당연한 거라고,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그 말을 받아들였다.
 
굉장히 오랜 기간, 내가 나인 게 너무나 창피했다. 이 창피함엔 의문이, 이유가 있을 수 없었다. 영문도 모른 채, 그저 내가 나인 게 부끄러웠다. 너무너무 부끄럽고 창피한 나를 끌고, 길을 걷는 것, 버스에 타는 것, 횡단보도를 건너는 것, 집 밖을 나서면 해야 하는 모든 것들에 겁이 났다. 한 걸음 내 딛을 때마다, 마음이 깎이고 작아졌다.
 
상처받은 자존감이 만든 혼돈 속에서
 
초등학교 5학년 때 대구에서 시골로 이사를 갔고 다시 학교를 옮겼다. 전학과 동시에, 대구에서 20등을 했던 나는 이곳에선 5등을 했고, 영문도 모른 채 잘나가는 아이들 무리에 편입되었다. 이종 사촌에게 물려받은 예쁜 옷들이 눈에 띄었는지, 여자 아이들이 내 주위를 둘러쌓다. 어느 날은 내 책상 주위를 빙 둘러싼 아이들 속에서 그림을 그렸다. 도시에서 왔다는 게 이유였을까.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이 관심을 받았다.
 
너무나 자연스레 그 아이들 속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다른 한쪽에서 혼자서 밥을 먹는 반 아이가 마음에 걸렸다. 마음이 너무너무 불편해서 무리에서 빠져나와 그 아이와 같이 먹었다. 스스로를 착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던 것 같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건 내가 이 아이와 다른 무리에 속했기에 가능했다. 나는 이때부터 사람을 구별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잘나가는 아이들과 친구를 하면서 마음에 걸리는 아이를 ‘돕는' 식으로. 내 행동과 내가 하는 말과, 마음속에서 고개를 쳐드는 감정의 차이가 너무 컸다. 겉으로는 사람을 돕고 챙겼지만, 속에선 끊임없이 누군가를 배제했고, 미워하고 싫어할 이유를 찾아냈다. 지금은 잘 기억나진 않지만 어느 여성작가의 ‘나는 힘이 있지만 그 힘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에 감동 받고 입으로 뱉어내면서, 내 힘을 과시하고 나를 세웠다.
 
어디선가 들은 좋고 옳은 말만 골라서 따라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느 곳에선 유창하게 말을 하다가도, 어느 곳에선 한마디도 하지 못했고, 집으로 돌아오면 ‘도대체 무엇이 내 생각인지 모르겠어.' 라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곤 했다. 무엇이 내 것인지 모르겠어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했지만, 그 순간마다 마주해야 했던 건 혼란스러움이었다. 왜 이렇게 감정과 행동이 다른지 살펴보지 못한 채, 나는 그저 천성이 못됐고, 타고 나길 아주 비열하고 이중적이라 여기며, 끙끙 앓았다.
 
“우리는 한마디로 가지각색이었다”  

▲ 벨 훅스의 <행복한 페미니즘>(박정애 역, 백년글사랑, 2007)  “우리는 한마디로 가지각색이었다." 는 그의 말은 내게 꽤나 큰 충격을 주었다. 
 
스물 중반이라는 성인의 나이를 하고서 어른에 대한 두려움이 하늘을 찔렀다. 몸은 어른이면서 마음은 자라지 못한 채, 오늘은 앞에서 웃다가 내일은 다른 모습을 보이는 어른들을 어린아이의 심정으로 바라보며 눈치 보기 일쑤였다.
 
나는 어떤 사람과 친해지고 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해졌고 그 불안한 마음이 겉으로 삐져나올세라 먼저 돌아서곤 했다. 그런 내가 사회에서 알게 되어 친하게 지낸지 얼마 되지 않은 친구 앞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그 동안 충분히 괜찮은 사람으로 무난하게 보였는데, 결국 이런 모습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얼마나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볼까, 두려움에 떨던 마음도 잠시, 친구는 "(나는) 너란 사람이 좋은 거야."라고 말해주었다. 이후에도 내가 불안해서 흔들릴 때 마다 여전히 "(나는) 너란 사람이 좋은 거야"라고 말해주었지만, 여전히 '왜 나를 좋아하지? 너도 곧 나를 싫어할 걸'이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그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렇다고 해서 너의 가치가 훼손되는 건 아니야."라며 건네준 말에 마음이 쿵하고 떨어졌다.
 
나는 왜 이걸 몰랐을까. 누구도 통과할 수 없는 높은 기준으로 스스로를 평가하면서, 매일 난도질을 했고, 그 만큼 작아지고 망가진 기분을 떨치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내가 훼손되는 건 아니었다니. 나는 왜 이걸 미처 알지 못했을까.
 
그 무렵 미대를 휴학하고 새로운 곳에서 일을 시작했다. 직장에서만은 잘하고 싶었고, 여느 때처럼 무난히 적응을 하며 몇 달을 보내고 나서였다. 갑자기 적응하기가 어려워졌다. 이전의 직장은 상하관계가 분명했고, 직원들과는 일적인 관계만 맺었기에 나는 어떤 감정적인 영향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선 달랐다. 모든 선생님들과 잘 지냈고 특히 원장님과 친했는데, '원래 알던 사이'라고 다른 선생님들이 착각할 정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친밀해졌다 싶으면 생기는 불안이 행동으로 나왔다. 무난하게 잘 지냈던 초반 3개월을 지나고 나서부터, 8개월 동안 다섯 번은 원장님 방에 찾아가 그만둔다고 말했던 것 같다. 이 보다 더 많이 원장님 방에 찾아가 울었고, 친구와 나눌법한 불만을 토로했다. 난 이곳이 너무 좋았고, 정말 그만두라고 할까봐 겁이 나면서도 행동이 자제가 되지 않았다. 이런 내가 절망스러웠다.
 
이제 원장님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고 나를 내칠 만도 한데, 원장님은 여전히 내 얘기를 들었고, 다음날 아무 일이 없단 듯이 나를 대했다. 오히려 아이들을 대하는 나의 모습이나 부모들의 평판을 들으며 나를 더 인정해주셨다. 시간이 지나도 나를 대하는 모습은 그대로였다. 변화는 내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와 있었던 듯하다. 불안한 마음과 행동이 간헐적으로 나오다가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거절 받을까 두근거리던 시간이 지나가고, 5년차로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 얼마 전에야 나를 봐주신 이유를 알았는데,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자기 모습을 찾을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단다. '사람은 누구나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고. 원장님 기준으론, 다행히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고.
 
이런 일을 겪으며, 내 안에 갇혀서, 내가 얼마나 왜곡되게 나와 타인을 바라보았는지 깨닫는 시간이 필요했다. 조금씩 스스로를 직면하면서 나는 더 불안해지기도 했고, '나이 먹도록' 어려움을 겪는 자신이 하찮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그 순간마다 나의 노력을 지지하고 나의 가치가 훼손되는 것이 아님을 알려준 여성들의 존재가 내 안에 너무나 크고 깊게 새겨져 있다. 여전히 내 곁에서 ‘내가 겪는 어려움마저' 나의 매력으로 여기는 이 여성들 덕분에, 내가 나를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이것은 얼마나 큰 행운일까.
 
서로를 판단하지 않고 이해하며 솔직한 만남을 일구다
 
때때로 예전의 습관이나 감정이 올라오지만, 그 감정 앞에서 더 이상 무력하지 않은 나를 본다. 오히려 그런 내 모습을 친구들과 희화화하며 서로 빵 터지게 웃곤 한다. 어느 날, 내 생각과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다르지 않고, 내가 느끼는 감정이 나란 사람이 느끼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내 말과 내 감정의 일치감을 느끼며 살아간다는 게 낯설면서도 즐겁다.
 
어느 덧 주위엔 자신의 어려움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마음을 주고받는 이들이 늘어났다. 어떠한 판단 없이 서로에 대해 진심으로 궁금해 하며, 닮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 모습들을 알아간다. 이런 과정은 타인을 이해하고 내가 이해받으며 좀 더 자신으로 살도록 도와준다는 것도 알아가고 있다. 그러면서 일방적으로 내 얘길 들어주고 나의 모든 행동을 다 살펴주었던 여성들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나날이 자란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페미니즘은 나에게 새로운 시각을 주고 그 시각 안에서 조금은 기댈 곳을 주었다. 그러나 아직까진 문자로만 존재했던 페미니즘에 날개를 달아준 건, 그 여성들 덕분이었구나. 이들 중 여럿은 나로 인해 페미니즘을 접했지만, 정작 내가 ‘페미니즘'을 ‘진짜로' 만난 건 이 여성들이 내게 보여준 애정 어린 모습을 통해서였다는 걸 이제야 알겠다. 곳곳에 존재하는 여성들의 통찰력으로 빚어진 ‘페미니즘'을 만나면서, 이제야 의심 없이 사람에 대한 선의를 가슴 속 깊이 느낄 수 있다.
 
9년 전, 우연히 접한 페미니즘이 멋지고 옳아 보여서 좋아하며, 이 ‘옳은' 기준에 빗나갈 때마다 페미니즘에 대한 마음을 조금씩 거두기도 했다. 페미니즘뿐 만이랴. 나를, 타인을, 세상을 이런 눈으로 보았었다. 지금 나의 페미니즘은 옳은 것도 완벽한 것도 결과도 아닌, 고민하고 부딪치며 수정하면서 가는 과정이고, 그 과정을 삶에서 놓지 않는 모습으로 다가온다.
 
막연하고 암담했지만 왜 그렇게 정리하고 싶었는지 나조차도 궁금했는데, 쓰면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말이 있다. 페미니즘을 알아가는 동안, 사람이 내게 주는 큰 기쁨을 깨달았다, 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시 '페미니즘'을 바라볼 수 있게 되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석은지)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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