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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 여성들의 3.1운동
[특집] 다시 유관순을 기리며① 3.1운동의 여성사적 의의  

 
‘3.1운동’과 ‘유관순 열사’는 마치 동의어처럼 짝으로 따라다닌다. 16세 나이에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감옥에 갇히고, 모진 고문을 받다가 17세에 옥사한 유관순은 “민족의 누이”, “독립운동의 꽃”으로 상징화되어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인 중 3.1운동을 ‘십대여성들이 주체가 된 독립운동’으로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다.
 
오히려 당시에 보도활동을 한 외국인 저널리스트가 “3.1운동에서 여성들, 특히 어린 여성들의 역할이 가장 눈에 띄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번 3.1절을 맞이해 총 4회에 걸쳐 3.1운동에서 여성들의 역할이 어떠했는지, 여성사로서 당시를 기록하고 그 의미를 살펴본다. (조이여울)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① 십대여성들의 3.1운동
② 독립투사였던 기생들
③ 비폭력 원칙을 끝까지 지키다
④ 여성운동사에서 3.1운동의 위치
 
“3.1운동의 가장 특이한 현상은 여성들의 역할”
 
3.1운동에서 ‘여성의 주체성’을 키워드로 읽어내는 작업은 무리한 것이 아니다. 당시 역사적 현장에 있었던 외국인 저널리스트는 3.1운동에서 여성들의 역할을 주요하게 포착하고 있다.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가장 특이한 현상은 여성들의 역할이었다. 약 20년 전만 해도 외국인 남자는 한국에 여러 해를 살아도 여자를 접촉해 볼 기회가 전혀 없었으며 거리에서도 만날 수 없었고, 한국인 친구의 가정에서도 볼 수가 없었다.” (Frederick Arthur Mckenzie, 1920)
 
프레드릭 아서 맥켄지(1869~1931)는 캐나다의 퀘벡에서 태어난 스코틀랜드계의 영국인으로, 영국 언론 「데일리 메일」의 아시아특파원으로 활동하며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뛰어난 저널리스트였던 맥켄지는 한국민들은 “한일합병”(韓日合拼條約, 1910)을 원치 않는다는 메시지를 세계에 전하였으며, 3.1운동이 일어나자 미국을 비롯한 열강들이 한국민의 여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설파하였다.
 
그는 3.1운동의 현장에서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1920년에 320페이지에 달하는 저서 『한국의 독립운동 (Korea's Fight for Freedom)』을 집필하였다. 이 책은 사회를 예리하게 관찰하고 기록하는 저널리스트의 시선과, 평화를 지향하는 세계시민의 관점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조명하고 있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 맥켄지는 한국민들이 전국적으로 일제에 항거하는 투쟁을 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비롯한 서구열강들이 일본의 눈치만 보고 있는 것을 비판하며, 의미심장한 경고를 하였다. 지금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을 견제하지 않으면 30년 내에 큰 전쟁이 일어날 것이고, 서양국가 중 가장 큰 부담을 질 나라는 미국일 것이라는 예견이다. 그의 경고는 현실이 되어, 일본의 진주만 공습(1941)으로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을 겪게 된다.
 
이처럼 아시아와의 상황과 세계정세를 통찰하면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보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기술한 저술에서, 맥켄지는 3.1운동에 대해 여성들, 특히 어린 여성들의 역할이 가장 눈에 띄었다고 쓰고 있다.
 
“전에 나는 한국인 상류 가정에서 한두 주일을 지낸 일이 있으나, 그 부인이나 딸들은 한 번도 볼 기회가 없었다.”
 
약 20년 전 한국에 왔을 때에는 거리에서, 심지어 한국인 친구의 가정에서도 볼 수 없었던 여자들이 국권회복을 위한 3.1만세시위에 앞장서서 참여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분석에는 당시 유교 문화권인 한국의 시대상이 깔려있다. 여자가 있어야 하는 곳은 집안이고, 집밖의 세상은 남자들의 영역이었다. 20년간의 큰 변화가 있다면, 여학교가 설립되어 소녀들 중에서도 배움의 기회를 갖게 된 이들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맥켄지는 한국에 기독교 교육과 신식 생활방식이 들어오면서, 젊은 여성들이 열심히 새로운 생활 방식을 채택하여 재래식 생활 장벽이 허물어지게 된 것으로 분석하였다.
 
자와할랄 네루 “코리아에서 어린 여학생들이 항일투쟁”
 
1971년 출간된 『한국여성운동사: 일제치하의 민족운동을 중심으로』에서 저자인 정요섭은 당시 교육받은 한국여성들은 일제의 교육정책이나 전통적인 여성관이 제시하는 여성상에 반하여 사회적인 각성과 지위 향상을 추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당시 일제의 한국여성에 대한 교육정책은 '황국여성'을 만드는 전초작업으로 일본은 철저한 복종형 여성상을 여성의 이상으로 제시하였다. 즉 일제는 한국여성에 대한 교육정책을 ‘특히 정숙 온량한 덕을 함양함을 요한다’는 미명 아래 무조건 복종하는 교육을 강요함으로써 근대 여성교육의 지향에 퇴보를 초래케 하였다. 그러나 당시 교육받은 한국여성의 교육관은 현모양처의 범주를 훨씬 넘어서는 단계에서 여성교육의 이상을 추구하였다.”
 
여학교가 설립되어 소녀들도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당대는 남녀가 유별하고 내외하며, 딸들은 아버지의 허락 없이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고, 여성에게 정치와 사회에 대한 발언권이 주어지지 않았으며, 여자는 정조를 지켜야 하고 남에게 함부로 몸을 보여서도 안 된다는 성규범이 지배적인 사회였다.
 

▲ 광주3·1만세운동기념동상.  이 동상은 수피아여중고 교정에 있다.  © 출처- 독립기념관 
 
그런 가운데 어린 여성들, 특히 공립학교에 다니는 여학생들은 앞장서서 만세시위를 조직하였으며, ‘국권회복을 위해 우리가 나서야 한다’는 투철한 사회적 신념을 가지고 3.1운동에 참여한 것이다.
 
1996년 발간된 『한국여성항일운동사연구』에서 저자 박용옥은 이들 소녀들의 3.1운동에 대해, 일제의 강경한 진압으로 남자들도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을 때 오히려 여성들이 용감하게 준비하고 실행함으로써 군중들을 시위운동으로 이끌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책에는 영국의 식민통치에 저항하여 인도 민족운동을 전개했던 자와할랄 네루(Jawaharal Nehru; 1889~1964)가 여섯 번째 투옥되었을 때, 16세의 딸 인디라(Indira Gandhi; 1917~1984)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한국 소녀들의 독립운동에 대해 이야기한 내용도 인용되어 있다.
 
“일본의 한일합방 통치는 인류역사에서 가장 참담하고 비통한 것인데, 그 코리아에서 어린 여학생들이 항일민족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네가 알면 너도 마음이 끌릴 것으로 안다.”
 
“여학생이 시작했다”, “여성에 의해 이루어졌다”
 
당시 만세시위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1919년 3월 보도된 신문들의 단신 사건 보도기사들을 통해서도, 여성들이 시위를 계획하고 주도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919년 3월 「매일신보」를 장식하고 있는 기사들은 서울을 비롯한 평양, 개성, 진주, 목포 등지에서 만세시위가 벌어진 것을 짤막하게 사건 보도로 전하고 있다.
 
‘여학생이 시작했다’, ‘여성들의 소요’, ‘여학생의 음모’, ‘진주 – 기생이 앞서서’, ‘구마산 - 여자가 많았다’… 등의 제목과 기사 내용이 곳곳에 눈에 띄어, 전국 방방곳곳에서 여성들이 항일운동을 주도했음을 말해준다.
 
“개성에서는 3월 3일 오후 2시에 만세성이 터졌다. 그런데 개성에서의 시위는 그 준비와 거사 거행이 모두 여성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3.1운동 60주년을 맞이하여 1980년에 ‘3.1 여성동지회’가 펴낸 『한국여성독립운동사: 3.1운동 60주년기념』은 전국 시.도별로 거행된 여성들의 만세운동을 기록하고 있으며, 이를 주도한 인물들의 이름도 살펴볼 수 있다.
 
서울 경성여고보의 최은희, 배화여고보의 김정애, 숙명여고보의 황현순, 이화여학교의 신마실라, 정신여학교의 김마리아, 진명여학교의 나혜석… 그리고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가 그 유명한 아오내 장터 시위를 이끌었던 유관순, 개성 지역의 만세운동에 불을 지핀 어윤희∙이경지 자매, 평양의 안정석∙박현숙, 대구의 이순애, 부산의 주경애 등이 역사에 남은 이름들이다.
 
그러나 『이화팔십년사(梨花八十年史)』에 “주동자로 몰려 투옥되고 검거된 학생들의 명단과 참여자 여부는 현재 알 길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듯이, 이름 없는 수많은 여학생들과 교사, 여성종교인들이 전국에서 독립운동의 선봉에 섰을 것임에 분명하다.
 
학교 밖 여성들의 경우는 더더욱 그 이름도, 흔적도 남지 않아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3.1운동의 주역으로 나서거나 투쟁하였으며 박해를 받았는지 위와 같은 기록들을 통해 가늠해볼 뿐이다.
 
일본경찰이 찾는 배후조종자는 없었다
 
맥켄지 기자가 주목하였듯이, 3.1운동을 조직화하여 펼친 주역으로서 십대 여학생들의 역할은 두드러진 것이었다.
 
『한국의 독립운동』에는 “전국에서 여학생들이 가장 활발했던 곳은 서울이었다. 예를 들어, 3월 5일 수요일 아침에 경찰에 잡힌 사람들의 경우를 보자. 그들은 거의 다 여학교 학생들이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국여성운동사: 일제치하의 민족운동을 중심으로』를 집필한 정요섭은 1만여 명의 여학생들이 시위에 가담했을 것으로 추산한다.
 
당시 일본경찰은 어린 여학생들이 이끈 만세시위를 누군가 뒤에서 기획하고 지도하였으리라 여기고, 학생들을 검거하고 심문하면서 배후조종자를 찾아내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배후에 있는 것은 여학생 당사자들의 의지와 신념뿐이었다.
 
오히려 여학생들은 교사들이나 어른들에게 해를 미칠까 염려하여, 학생들끼리 비밀회동을 하고 만세시위를 기획하였다. 미션스쿨에서는 여학생들이 미국인 교사들에게 피해가 돌아가지 않게 하기 위해 전원이 자퇴서를 내고 시위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3.1운동에 참여한 여학생 중 한 사람인 저널리스트 최은희가 후일 집필한 『한국 근대 여성사 (상)』편에는, 십대소녀들이 어떤 마음으로 독립운동을 펼쳤으며 어떻게 투쟁하였는지 당사자들과 지인들의 회고와 증언을 모아 수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목포 정명여학교 재학생인 14세의 소녀 김정애는, 헌병에 에워싸여 경찰서로 검속되어 가는 과정에 기수가 되어 앞장섰으며 “왜 우리들이 선생님 조종을 받지 않고는 못 나온단 말이에요. 일본 사람들은 어른만 애국심이 있고 아이들은 애국심이 없는 식충이들만 산다는 이야긴가요. 조선 사람은 삼척동자도 나라를 사랑할 줄 알아요. 우리들은 벌써 14,15세의 장성한 처녀들이에요.” 라고 말했다.
 
3월 3일 개성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서 주모자로 검거된 이들은 호수돈여고보 학생들이었다. 징역 2년 형을 받고 서대문감옥에서 복역한 어윤희는 경찰의 심문에 “새벽이 되면 누가 시켜서 닭이 웁디까? 우리는 독립할 때가 왔으니까 궐기를 하는 것이지요.” 라고 말했다.
 
유관순, ‘민족’이 아닌 십대여성들의 상징으로 

▲ 천안 유관순열사 동상  ©출처: 유관순열사기념관 
 
3.1운동을 기억하고 그 의의를 평가하는 과정에서, 지금으로부터 90년 전 아버지의 권유에 따른 것도 선생님의 지도를 받은 것도 아닌, 십대소녀들이 주체가 되어 독립운동을 기획하고 지역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역사의 현장을 되살려보는 것은 현재의 시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3.1 운동이 일어난 지 90년이 지난 지금, 한국에서 유관순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이는 거의 없다. 후대의 역사 기록을 통해 유관순은 “민족의 누이”이자 “독립운동의 꽃”으로 상징화되었다.
 
그러나 이제 그 이름은 소수 앞서나간 “민족의 누이”가 아니라, 3.1 운동의 주체가 된 수많은 여성들-특히 십대여성들, 여학생들, 소녀들-의 상징으로 읽혀야 한다. 더 나아가 기생들과 가정주부들, 백정의 아낙들을 포함하여 당대 비폭력 저항운동을 펼친 여성들의 상징으로서 “유관순들”로 새롭게 읽혀야 할 것이다.
 
만약 1919년 한반도 전역에서 물결쳤던 3.1운동의 현장을 ‘한국의 소녀들이 주체가 된 비폭력 저항’으로 역사가 기억하고 있었다면, 2008년 광우병 미국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의 불씨를 지핀 한국의 십대여성들의 존재가 낯설고 놀랍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 (조이여울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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