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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되지 않은 역사] 귀환을 가로막은 장벽은 누가 만들었나

[75년전, 일제에 의해 강제이주 당하고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할린 한인의 역사와 삶, 그리고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를 짚어보는 “기록되지 않은 역사” 기사를 연재합니다. 필자 최상구님은 지구촌동포연대(KIN) 회원으로 사할린 한인 묘지조사 후속작업, 영주귀국자 인터뷰 등 ‘사할린 희망캠페인단’ 활동을 펴오고 있습니다. www.ildaro.com]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남사할린에서는
 
1945년 2월 얄타회담을 통하여 소련은 2차대전 참전의 대가로 남사할린의 영토 귀속을 약속 받는다. 이에 8월 소련은 대일선전포고를 통해 일본과의 전쟁을 시작하였고, 8월23일 경 남사할린을 점령하고 일본인에 대한 출국금지 조치를 취한다. 여기에는 일본 국적이었던 조선인들도 포함되었다.
 
일본이 점령했던 남사할린을 소련이 점령하게 되자, 사할린에서 전후 처리 문제들은 연합국 총사령부(GHQ)와 소련에 의해 결정되었다. 연합국 총사령부는 조선인에 대해 해방민으로서 ‘일본인’에 포함되지 않지만, 아직은 ‘일본 국민’이기 때문에 필요할 경우 적국인으로 취급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조선인이 희망하면 규칙에 따라 귀환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조선인들이 대거 귀환할 시기에, 이들은 “해방 국민이기는 하되 독립국가의 국민”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들의 처우는 국제 정세나 상황 논리에 따라 승전국민, 패전국민, 제3국민(난민) 등으로 치부되는 등 항상 들쭉날쭉했다.
 
한편 남한 또는 북한은 미-소의 분할 점령으로 인해 독립국가의 영토가 아닌 점령지역으로 치부되고 있었다. 따라서 송환당국에게는 일관된 귀환정책도 없었고, 조선인들에게는 ‘자국민’을 보호할 국가권력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타지에 남겨진 조선인들이 다수 발생하게 되었다.
 
귀환하는 일본인, 사할린에 억류된 한인

▲ 코르사코프 항구에 있는 망향의 언덕에 세워진 위령탑     © 최상구

사할린 지역의 일본인들에 대한 귀환 논의는 1946년 태평양연합군 사령부가 귀국에 관한 기본적 지령을 발령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그 해 12월 “소련지구 인양에 관한 미소협정”을 통해, 1948년까지 약 30만명의 일본인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당시 협정에서 귀환대상자는 ‘일본인 포로’, ‘일반 일본인’으로 규정되어 있었는데, 일본은 일본 호적에 등재된 사람만을 일본인으로 간주하여 한인은 제외시켰다. 코르사코프와 홈스크에 도착한 귀환선에 조선인의 승선은 거부되어,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조선인이 포함되지 않은 것에 대해 후에 소련 적십자총재는 이렇게 언급했다.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조선인에 대하여서는 일본 당국이 조선인들을 일본 공민으로 간주하지 말 것을 공식 요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조선인은 무국적자로 소련에 영주하게 되었습니다.”
 
사할린에서 한인들을 제외시킨 채 진행된 인양 사업은, 일본 본토에서 이루어진 한인들에 대한 신속한 귀환 처리와는 대조적이다.
 
패전의 혼란 속에서 많은 기업들이 조선인 노동자를 무차별 해고하는 등 실업 문제나 귀환 문제로 인하여 언제 혼란사태가 생길지 모르는 상황에서, 조선인들은 치안유지상 잠재적으로 위협적인 존재였다. 이에 따라 일본에서는 1945년 9월 “집단이입노동자 계획수송에 관한 지시”를 통해, 12월 이전에 강제 징용되었던 조선인 노동자 대부분이 송환되었다. 이처럼 일본은 전후 강제동원 조선인들을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처리한 것이다.
 
연합군 최고사령부에서 사할린 한인의 귀환 문제가 논의된 것이 세 차례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하나같이 한인들이나 이들이 조직한 단체로부터의 직접적인 청원에 의해 검토되었다는 점에서, 일본이 얼마나 이 문제를 철저히 외면하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또 다른 강제동원: 노동력이 필요했던 소련
 
인양자 명부는 일본의 기업을 접수한 소련의 각 공장과 생산 현장의 지도부가 작성하고, 정부 기관에서 검토한 후, 인양위원회에서 승인하였다. 생산 현장에서 정부기관에 보낸 편지들에는 노동력의 공백을 우려하는 내용이 많았다. 일본인이 대규모 귀국을 하고 나면 노동력이 부족하여 조업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인양의 규모나 기간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런 필요에 따라 조선인들을 정착시키기 위한 조치들이 취해진다.
 
먼저 1946년 주민 거주등록을 시작하면서, 거주신고서에 의해 신분증명서를 발급하게 된다. 억류된 조선인들이 정착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리고 같은 해 9월에는 조선인들을 사할린에 고착시키기 위해 조선학교를 열기도 했다. 또한 억류된 조선인들에 대한 정치 교양 사업을 강화할 목적으로, 과거 중앙아시아로 이주했던 고려인들이(사할린 한인들은 이들을 ‘큰땅배기’라 부른다) 돌아온다.
 
일본인들이 떠나고 있는 상황에서 사할린주 행정부가 조선인들이 일본인들 속에 포함되어 일본으로 귀환하지 못하도록 감시 강화를 지시하기도 하였다. 이와 더불어 1948년에는 수도 유즈노사할린스크, 항구도시 코르사코프, 홈스크에서 조선인을 탄광지역인 우글레고르스크와 레소고르스크지구로 이주시키는 조치가 취해졌다.
 
목적은 대륙에서 이주해온 러시아인을 주요 도시의 주택에 살게 하고, 반소 활동이 가능한 구일본국민의 조선인을 주요 도시부에서 멀리 교통이 편리하지 않은 곳으로 보내어 버리는 것이었다. 사할린 지역에서 노동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1946~1949년까지 북한에서 노동자를 약 2만6천명 파견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한편,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사할린 한인 실태조사, 귀환 희망 유무 등 정보와 더불어 이에 대한 소련의 입장을 요구했지만, 소련은 명확한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부적으로는 북한과의 관계 속에서 귀환 문제를 다루었다. 1947년에 사할린 한인의 송환 여부에 대해 조선인을 북조선으로 송환하도록 승인하며, 귀환 조선인의 모든 사유재산을 북조선에 양도한다는 등의 원칙을 정했다.
 
이러한 소련의 태도는 연합국 전후 처리의 입장보다는 자국의 이해에 부합되도록 처리하면서 북한의 입장도 고려한 것이었다. 일본인의 귀환으로 급격한 노동력의 공백을 우려한 소련은, 조선인을 이용하고자 했다.
 
미군정의 반대…냉전 체제에 매몰된 남한 정부
 
남한의 질서유지를 가장 중요한 과제로 여겼던 미군정은 이미 종전 후 일본에서 150여만명의 동포들이 귀국해있었던 상황에서 재외한인의 귀환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의 귀환으로 인해 발생하는 식량 및 주택 사정을 들어, 귀환 계획의 요청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던 것이었다. 1948년 2월 사할린 한인의 귀환을 현 시점에서 소련 측에 신청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이승만 특유의 반일, 반공주의는 사할린 한인을 포함한 재외동포에 대한 전반적인 정책 실패로 이어졌다. 이승만은 재외동포의 본국 출입과 국내 정치 참여를 극히 제한하기도 했고, 재일동포 사회나 재미동포 사회의 반이승만 움직임조차 국제공산주의의 일환으로 간주하였다.
 
또한 재외동포 사회 내에서 공산주의가 확산되는 것을 막고, 이들을 포섭하기 위한 방법으로 재일민단 공인, 재외국민 등록, 영사업무 민단 위양 등의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러다가 일본에서 결국 재일동포를 북한으로 보내는 북송 사업이 시작되자, 일본과의 관계도 최악으로 치닫게 된다.
 
한편, 1951년 9월 체결되어 이듬해 4월 28일 발효한 ‘샌프란시스코 대일 강화조약’ 제2조에서 일본은 조선(한국)의 독립을 승인한다고 한 것을 근거로, 사할린 한인과 재일한인을 포함한 모든 한인의 일본 국적을 박탈하였다. 한인의 일본 국적을 박탈한 이후, 일본과 소련의 국교정상화에 따른 일본인 귀환 과정에서 사할린 한인은 또다시 제외된다.
 
1956년 10월 일-소 공동선언으로 일본과 소련이 국교를 수립하고 1957년 8월 1일부터 1959년 9월 28일까지 모두 7차례에 걸쳐 소련 땅의 잔류일본인들 뿐만 아니라 현지에서 사망한 유골까지 송환되었다. 이때는 일본인과 결혼한 한인과 그 가족의 귀환도 허용되어, 일본여성과 결혼한 한인남자 및 그 가족 1천541명만이 일본으로 귀환하였다. 당시 일본은 한인을 외국인으로 취급하였다.
 
“할아버지 마가진(‘상점’ 러시아어) 이키마쇼(‘가요~’ 일어)
 
일제 강점기에 사할린으로 갔던 한인들은 3개 국어를 한다. 태어나 부모에게 배운 한국말, 학교에서 배운 일본말, 그리고 살기 위해 배운 러시아말. 이 굴곡의 삶은 한 동포의 말로 잘 표현된다. “나는 조선말도 할 줄 알고, 일본말도 하고 노국말도 하지만 그 어느 하나 내 말이 없다.”
 
사할린에 갇히게 된 이들. 고향으로 가는 길이 좌절되면서 이들은 그리운 가족과 생이별해야 했다. 서신왕래조차도 한국전쟁 등으로 어렵게 되자, 국내 가족은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제사를 지내다가 40여년이 지나서야 만나게 되는 세월을 겪는다. 아내와 아이들을 두고 홀로 갔던 남자들은 언젠가 돌아갈 것이라는 믿음 속에 무국적과 독신으로 살다 쓸쓸히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그 아내와 아이들은 남편과 아버지 없이 어렵게 생활할 수밖에 없었으며, 아내와 남편 모두 재혼을 했다 모국 방문시기에 만나게 되는 기막힌 사연들도 있다.
 
또한 ‘이중징용’으로 사할린의 가족과 이별하고 일본으로 간 남자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사할린으로 들어가거나, 한국으로 귀국하는 등 가족의 해체와 이산의 아픈 사연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어머니가 재혼한 서진길 이중징용광부 유가족회 회장의 팔뚝에는 ‘최’ 문신이 있다. 부친의 성이 최씨인 줄 알고 문신을 새긴 것인데, 후에 친부의 성이 서씨임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 사람들을 가로막았던 장벽은 아직도 견고하다. 일본은 사할린 한인들에 대한 법적 책임을 회피하고 있고, 한국 정부는 ‘일본이 책임져야 한다’고만 하면서 뒷짐을 지고 있다. 이들에 대한 체계적인 지원을 위해 필요한 법 제정을 하는 일도 ‘발의’만 세 번째인 우리 국회 역시, 장벽을 견고하게 만드는 주역이다. 사할린에서, 일본에서, 한국에서 이 장벽을 허물기 위한 노력들을 새해에는 기대해 본다.

*참고자료/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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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종 <사할린 한인동포 귀환과 정착의 정책과제> 한국동북아논총. 제11권 제3호, 2006. 9.
김승일 <사할린 한인 미귀환 문제의 역사적 접근과 제언> 한국근현대사연구, 제38집, 2006. 가을.
노영돈 <사할린 韓人의 歸還問題에 관하여> 人道法論叢
노영돈 <사할린한인문제, 어떻게 되고 있나?> OK times 통권 제129호, 2004. 8.
법무부 <사할린 교포의 현황과 법적 지위> 1986
이연식 <왜 식민지하 국외 이주 조선인들은 해방 후 모두 귀환하지 못했을까> 내일을 여는 역사. 제24호, 2006. 여름.
이토 다카시, 김문규 옮김 <사할린 아리랑-카레이스키의 증언> 눈빛, 1997.
최계수 <사할린 억류한인의 국적귀속과 법적 제 문제> 한국근현대사연구. 제37집, 2006. 여름.
새고려 신문 http://cafe.naver.com/sekoreasinm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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