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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로드트립> 14. 그레이트 짐바브웨(Great Zimbabwe) 
 
애비(Abby)와 장(Jang)-대학에서 만난 동갑내기 부부입니다. 만으로 서른이 되던 해 여름에 함께 떠나, 해를 따라 서쪽으로 움직인 후 서른둘의 여름에 돌아왔습니다. 그 중 100일을 보낸 아프리카에서 만난 사람과 세상의 이야기를 나누려 합니다.

돌 안의 영혼을 끌어내는 ‘쇼나 조각’에 매혹되다 

▲ 현대 미술의 중요한 한 장르로 인정받고 있는 쇼나 조각     ⓒ위키피디아 
 
에티오피아에서 남아공까지의 종단 루트 위에 놓인 여러 나라 중 짐바브웨를 경로에 넣은 것은 ‘조각’을 보고 싶어서였다. 짐바브웨(Zimbabwe)라는 나라 이름이 ‘돌로 만든 집’이라는 뜻일 만큼 이 나라엔 돌이 많다. 특유의 석조 건축과 조각도 오래전부터 발달했다. 특히 짐바브웨 인구의 70%를 차지하는 쇼나(Shona) 부족은 돌을 다루는 능력이 뛰어난 것으로 유명하다. 이들의 조각은 텡게넨게 조각 공동체의 작품이 20세기 중반 영국 런던에서 각광 받으며 본격적으로 세계에 알려졌고, 이후 ‘쇼나 조각’은 현대 미술의 중요한 한 장르로 인정받아 왔다.
 
쇼나 부족은 해와 공기나 마찬가지로 돌에도 정령이 있다고 믿었다. 조각이란 사람의 생각대로 돌을 쪼는 것이 아니라, 돌에 스민 그 정령의 인도를 받아 돌 안의 모습을 꺼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쇼나 조각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작업 과정은 ‘적합한 돌’을 고르고, 돌이 말을 걸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어떤 상이 떠오르면, 돌에 직접 스케치하는 과정을 생략한 채 정과 망치, 끌, 사포 등 가장 기초적인 도구만을 사용해 돌을 깎고 연마한다. 대부분 자연 상태의 돌만을 쓰기 때문에, 때로 조각가들은 특별한 돌을 찾기 위해 아주 먼 여행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쇼나 부족에게 조각은 오랜 신앙과 명상의 산물이었을 텐데, 나를 매료시킨 것은 그 깊은 사색을 통해 나온 작품들의 소박함과 순수함이었다. 평화로운 아기의 얼굴, 둥글게 어울려 춤추는 사람들, 아기를 안은 엄마의 미소 등 차갑고 딱딱한 돌임을 잊을 만큼 따뜻한 작품들은, 그 돌을 만진 사람들이야말로 인간과 삶의 근원에 닿아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게 했다. 도록에서만 본 그 작품들을 꼭 직접 보고, 느끼고 싶었다.
 
- 누나, 괜찮아? 정말 괜찮겠어?
 
블라와요를 떠나는 날이었다. 버스 터미널에 가는 길에, 옆에 따라 붙은 스무살이 찜찜한 듯 물었다. 괜찮아, 하고 녀석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이다지도 긴 소개가 무색하게, 결국 내가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뭐, 괜찮지 않으면 어찌하리.
 
불라와요에도 국립 미술관이 한 곳 있었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 국제 컨퍼런스로 일정 기간 전시를 중단한 상태였다. 작가들의 커뮤니티를 방문하려면 수도인 하라레(Harare)로 가야 했으나, 현지의 상황과 일행들의 컨디션 등 여건이 여의치 않았다. 장과 나 둘 뿐이라면 일단 하라레로 가서 상황을 풀었겠지만, 지금은 스무살에 더해 타자라 열차에서부터 동행한 킴까지 있어 내 고집만 부릴 수가 없었다.
 
고심 끝에, 결국 하라레를 포기하고 ‘그레이트 짐바브웨(Great Zimbabwe)’라는 천 년 전의 석조 유적지로 경로를 틀었다. 작금의 세계는 아닐지라도, 그 작가의 조상이 돌을 다루었던 품과 마음을 맛볼 수는 있으리라.
 
마싱고로 향하는 버스 안에는 비가 내리고

▲ 외국인을 노리는 야수들의 정글, 불라와요 렝키니 버스 터미널 ⓒ Abby
 
- 어디 가?
 
터미널에 다다랐을 즈음, 누군가 장에게 말을 걸었다. 왜 그랬는지 전에 없이 장은 마싱고(Masvingo), 하고 답을 주었다. 신이 난 남자가 정류장까지 따라붙으며 마싱고 마싱고! 하고 방정맞게 외치는 소리가 내 귀엔 빙고, 빙고! 하고 들렸다. 텐 달라 온리, 온리 텐 달라! 그러나 우리가 그 말을 선선히 믿을 리 없다. 시장통 같은 터미널 한 쪽의 “마싱고” 말뚝 아래 앉자, 두툼한 지폐 뭉치를 든 아저씨가 다가와 오늘 마싱고 행 대형 버스는 끝났다며, 옆의 미니버스를 타라고 했다. 얼마인가요. 하고 묻는 내 말을 잡아채 그와 딜을 하려는 젊은 남자를 아랑곳 않고 지폐 뭉치 아저씨가 웃음 띤 얼굴로 답했다. 팔 달러, 버스와 똑같아요.
 
한국에서면 세 명이 앉아도 빡빡할 봉고차 한 줄엔 좌석 머리받침대가 다섯 개 박혀 있었다. 이미 짐이 꼭꼭 들어찬 구석에 짐짝처럼 몸을 붙인 내 옆으로 장, 킴, 스무살이 꼭꼭 끼어 앉았다. 정말이지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이런 버스는 당연히 외국인의 차지가 아니다. 하긴, 지금의 짐바브웨엔 외국인 자체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러니 터미널의 사람들이 마치 연예인이라도 본 듯 휴대폰을 들고 우리 사진을 찍었다. 브이를 그리며 포즈를 취해 주면서도 카메라를 들고 그 모습을 마주 찍었다. 그 모습을 본 차 안의 사람들이 키득거렸다.
 
버스가 출발하고 얼마 되지 않아, 예고도 없이 폭우가 쏟아졌다.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거센 비였다. 그런데 세상에. 전면의 차창에 와이퍼가 없었다! 그래서 수시로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전방을 살펴야 하는 운전사는 창을 닫지 못했다. 운전수 바로 뒤에 자리 잡은 나는 때때로 얼굴을 훔쳐야 할 만큼 소낙비를 맞았다. 차벽에 팔을 붙이니 흠뻑 젖은 차벽에서 질척하게 물이 배어 나왔다. 문 쪽에 앉은 스무살은 제대로 물리지 않은 문 위에서 후드드득 떨어지는 비를 맞았다. 장과 킴이라고 사정은 다르지 않아, 비새는 천장으로부터 한 방울 두 방울 똑똑 떨어지는 비를 털어냈다. 폭우는 차 밖의 일이건만, 차 안의 우리는 오래지 않아 밖에 나앉은 듯 쫄딱 젖었다.

▲ 미니 버스에 탄 외국인이 신기한 듯 사진 찍고 구경하는 사람들     ⓒ Abby
 
빗길을 천천히 달리느라, 예상보다 훨씬 늦어 해가 질 무렵에야 마싱고에 도착했다. 듣던 대로 인가는 보이지 않고 어딘지 휑한 동네였다. 목적지인 ‘그레이트 짐바브웨’ 유적지 안의 배낭여행자 숙소까지는 이곳에서 버스를 한 번 더 타야 했다. 그런데 운전사가 터미널에서 내리려는 우리를 만류했다. 여기서는 유적지행 버스를 탈 수 없다는 거였다. 그를 믿어도 좋을까 하는 의구심이 올라왔으나, 터미널에는 주로 장거리 버스만 다니니 그럴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령 그를 믿는 것이 위험하다 한들, 어둡고 불확실한 거리에 내리는 것도 위험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우리를 제외한 모든 승객이 내린 후에도 운전사는 여기 저기 거리를 헤매며 길가의 미니버스들을 찾았다. 운전사들에게 그레이트 짐바브웨까지 가는지를 묻는 눈치였다. 그 사이 한 남자가 차창으로 다가와 내게 물었다. 거기 가고 싶어? 당신 버스가 거기 가나요? 글쎄. 간다면 얼마를 줄 건데? 백달러? 느물느물 웃으며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대는 놈에게 어쩐지 오기가 났다. 당신 차 안 탈거니까, 꺼져요. 그를 쏘아 보며 말했다. 어깨를 으쓱하며 돌아서던 그가 위협적으로 우리를 쏘아보았다. 역시 이 시간 거리를 헤매는 것은 날 잡아잡수 하는 일이다.
 
결국 시내를 거의 벗어난 어느 모퉁이에서 유적지행 미니버스를 찾아냈다. 우리보다 앞서 탄 승객들의 면면이 아저씨, 아기를 안은 아주머니 등으로 다양한 걸 보니 마음이 놓였다. 우리를 내려놓은 앞선 버스의 운전사도 안심이라는 표정으로 안녕을 고하더니 지체 없이 차를 돌렸다. 이름을 물으니 로브마, 라고 했다. 로브마에게 고개를 숙여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아프리카에서는 누군가 베풀어 준 대가 없는 친절이 유난히 오래 기억에 남았다.
 
1000년 전, 아프리카 남부에 찬란한 문명이 있었다
 
유적지 입구에 내려서도 전등 없는 숲길을 일 킬로미터쯤 걸어야 했다. 출몰하는 야생 동물만 아니라면, 저 큰 나무 둥치 어딘가에 그냥 짐을 풀고 침낭 속에 쏙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저 멀리에서 불빛이 나타났다. 저기다! 중고등학교 시절 다닌 수련회장처럼, 큼직큼직한 건물 두셋에 야전 침대를 주욱 깔아 놓은 형태의 집단 숙소였다. 한구석에 처박힌 정신없는 매트리스 중 나은 것을 고르느라 먼지를 뒤집어썼다. 넓디넓은 건물에 투숙객은 우리뿐이다. 참새만한 나방이 날아다니는 샤워실에서 간신히 몸을 씻은 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곯아떨어졌다.
 
이튿날 아침 일찍 밖에 나와 심호흡을 했다. 여섯시도 되지 않은 새벽에 이리도 신선한 아침 공기를 마실 수 있다니, 유적지 안의 숙소는 안전하고 상쾌했다. 비록 방 안엔 죽은 박쥐가 있고 사람보다 부지런한 바분 원숭이들이 지붕 위를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통에 오롯이 인간만의 공간이라 부를 수는 없었지만, 스무살은 이곳을 곧 ‘해피 도미토리 랜드’라고 부르며 좋아했다.

▲ 그레이트 짐바브웨 유적지 중 안채 궁전에 해당하는 '엔클로저' 전경     ⓒ Abby
 
그레이트 짐바브웨의 본격적인 유적지로 들어갔다. 입장권 가격에 1인당 3달러 정도를 더 지불하면 가이드 한 명이 그레이트 짐바브웨를 함께 돌며 설명을 해 준다. 천천히 걸어 모두 돌아보는 데는 세 시간 남짓이 소요된다고 했다. 나지막한 화강암 언덕을 중심으로 사방이 너른 평원의 곳곳에 건축물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거대한 화강암 도시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까마득한 평원이었다.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11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멸망 후에는, 16세기 포르투갈인이 이 유적을 발견했다. 이집트와 사하라 사막 이남엔 문명이 없었다고 주장했던 서구인들의 믿음을 보기 좋게 깨뜨린 고대 도시였다. 그래서 그들은 부정하고 우겼다. 흑인들이 이 정도의 건축물을 세웠을 리 없고, 아마 이집트인들이 남하해 세운 것이리라 주장했다. 혹자는 지중해 인들의 작품이라, 혹자는 솔로몬의 지혜를 시험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방문한 시바 여왕의 왕궁이라고도 했다.
 
아프리카의 이름난 거부로 전해지는 여왕의 거처, 성경에 등장하는 황금의 제국이라는 가설은 수없이 도굴꾼들을 불러들였고, 다양한 금 세공품과 문화재가 약탈되면서 유적은 파괴되었다. 그러나 결국 발굴 조사 결과, 유적은 짐바브웨의 원주민 부족이 건설했음이 밝혀졌다.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그 정도로 훌륭했다.

▲ 아무런 접착제 없이 둥글게 쌓아 올린 채 수백년간 보존되어 온 성벽. 둥글게 쌓아올린 이 건축물과 성벽이 원주민의 솜씨임을 백인들은 부정하고 싶어했다.     ⓒ Abby
 
- 이게 바로 돌을 채취한 방법이에요.
 
어느 집채만 한 바위 앞에서 가이드가 말했다. 바위틈에 무언가를 박아 넣은 흔적이 있었다. 바위에 나무 조각 등을 박아 넣은 뒤, 뜨겁게 달구다가 찬 물을 붓는 방법으로 커다란 바위를 일정한 방향으로 쪼갰다. 그리고 나누어진 바위를 건축할 곳으로 옮겨, 시멘트 등의 어떤 접착제도 쓰지 않고 정과 끌 같은 기초적인 도구로만 깎고 쌓아 성벽과 탑을 완성했다. 300년간 지어졌다는 유적은 문외한인 우리 눈에도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특히 왕비가 거처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둥근 탑과 물이 흐르듯 유려하게 둘러싸인 담은 웅장하면서도 부드럽고 우아했다.
 
이곳으로부터 쇼나 조각이 발전했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유적지의 면면은 쇼나 조각과 닮은 데가 있었다. 주변의 경관을 해치지 않고 지형지물을 이용해 세운 자연스러운 아크로폴리스의 흔적은, 돌 안의 형태를 마주하기 위해 몇 시간이고 기도하고 명상했다던 조각가들의 심성을 생각나게 했다. 현재의 쇼나 조각이 한 사람에 의한 한 점의 작품이라면,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수없이 많은 석공이 함께 백만 개에 가까운 돌을 깎고 다듬고 쌓아 올린 공동체의 작품이다. 천 년의 시간차를 둔 그 예술가들이 돌을 대하는 태도와 정신은 같았으리라 짐작했다.
 
이 세상에, 지배당해 마땅한 것이 있는가 

▲ 바위 위에 절묘하게 쌓은 아크로폴리스. 신전인가 성채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 중이다.  
 
‘사라진 문명’처럼 신비한 것이 있을까.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기후 변화로 극심한 가뭄을 겪고, 부족이 북쪽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점차 쇠퇴했다고 한다. 한 때 2만 명 가까운 사람이 살았던 융성한 도시가 시나브로 텅 비었다. 도시는 번성한 시절의 기운을 품은 채 조명이 꺼진 듯 그대로 몇 백년간 잠들고 만다.

언제나 거기에 있었으나 누구도 발견하지 못하던 도시가 다시 깨어나는 것은, 어쩌면 스스로의 의지일 지도 모른다. 후세에 필요한 천 년 전의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너희는 미개하므로 우리의 지배가 마땅하다”고 외세로부터 무시당해 온 민중들에게, 천 년 전 민중의 피와 땀이 서린 이 유적은 “그렇지 않다”는 위로였고 힘이었다.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남아프리카 사람들의 자존심이다. 세월을 말해 주는 돌의 이끼들, 벽의 만듦새와 짜임새, 웅장한 규모에 진심으로 감탄하는 우리에게 곳곳을 설명해 주던 가이드도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구태여 철학도 사상도 거창하게 정리하지 않지만, 아프리카 사람들이 남긴 흔적은 어딘지 가장 원초적인 가치를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조화와 어울림과 인간 사이의 신의 같은, 이 땅에서 발견된 지구 최초의 인류에게 심겨 있던 가장 근원적인 가치들 말이다. 유적지의 둥근 돌벽에 손바닥을 대고 나오면서, 이 돌에 스며 있다는 영혼들에게 기도했다. 오늘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고통을 헤아려 주시기를. 오랜 고난으로 깨어진 균형과 파괴된 인간성을 우리가 어디서부터 회복할 수 있을지, 이 곳에서라면 힌트를 얻을 수 있을까.  (Ab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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