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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삶을 살며 소명을 찾는 일이 중요해”
<선 밖으로 나가도 괜찮아> 박푸른들이 찾는 ‘내 안의 목소리’ (상) 
 
‘여성주의 저널 일다’는 사회가 강요하는 10대, 20대의 획일화된 인생의 궤도를 벗어나, 다른 방식의 삶을 개척해가는 청년들의 시간과 고민을 들어봅니다. 특별기획 “선 밖으로 나가도 괜찮아” 연재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정서적 독립행 기차에 오르다 

▲ 이번 추석에 고향인 충남 홍성군 홍동면 금평리에 가서 찍은 가을 논이다.  ⓒ 박푸른들 
 
나는 충남에 있는 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같은 마을에서 어린이집부터 대학과정까지 다녔다. 그리고 스물세해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마을 논에 있는 벼가 익어가는 냄새를 맡았다.
 
대학과정에서는 유기농업을 공부했다. 이른바 대안 대학 같은 학교였다. 그리고 졸업 후 2년 동안 마을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일을 했다. 내게 우리 마을은 훌륭한 학교였고 이웃들은 유쾌하고 지혜로운 스승이었다. 마을 소개는 다음 회 글에서 자세히 하도록 하겠다.
 
나는 그 안에서 공부를 하고 일을 했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해야만 하는 생각과 선택을 자꾸만 주변 스승들에게 미루는 나를 발견했다. 대안학교 학생이라면 상당히 능동적일 것이라 상상하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듯 대안학교도 마찬가지다.
 
수동적인 내 모습을 알게 된 해, 마을에서 2년 동안 하던 일을 정리하고 제주도여행을 다녀왔다. 그리고 올해 2월 마을과 스승들에게 '정서적 독립'을 하기 위해 차곡차곡 짐을 꾸렸다. 전혀 다른 문화를 경험해보자며 혼자 큰 가방을 메고 서울로 가는 독립행(獨立行) 기차를 탔다. 

▲ 서울로 가는 독립행 기차를 타기 전 기념사진을 찍어두었다     ⓒ박푸른들  

삶의 다양성을 접하고 상상력을 넓히기
 
"나의 벽이 세워지면 우주로부터 아무 것도 흘러들어 오지 못한다. 반면 벽이 허물어지면 우주로부터 사랑과 지혜의 에너지가 가득 흘러나온다."
(왓칭, 김상운, 정신세계사, 2011)
 
지난 해 어느 가을 날, 이 글이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며 마을에 계신 한 스승이 문자를 보내주셨다. 그 날 이후 내 안의 공고한 벽을 허물기 위해 애쓰기로 마음먹었다.
 
서울로 이사 가는 길 구체적인 세 가지를 약속을 정했다. 경제적 독립, 하지만 6개월 동안 돈 벌 궁리는 하지 말 것, 그리고 신나게 쏘다닐 것.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한동안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다채로운 경험을 실컷 해보고 싶었다는 욕심에서 비롯된 약속이었다. 그리고 2년 동안 마을에서 일한 덕분에 아껴 쓰면 6개월 동안은 돈 걱정 안하고 쏘다닐 경제적 여유가 있었다. 재투자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서울에 오자마자 사진아카이브연구소(이하 '연구소')라는 작지만 힘차게 움직이는 연구소에서 인턴을 시작했다. 다양한 대상의 이야기를 사진으로 엮어내는 일을 하기도 하고, 직간접적으로 미시사적 아카이브지원도 하는 곳이었다.
 
나는 지난 2년간 마을에서 마을의 다채로운 이야기를 담아내는 일을 해왔다. 나의 주변의 이야기를 정리한다는 것은 매력적인 일이었다. 연구소 인턴은 그 일을 좀 더 잘해보기 위한 욕심의 연장선이었다. 연구소에서는 주로 서울 근현대사 조사, 한국 근현대 사진 정리, 일반인 대상으로 하는 사진 기록 교육 등의 일을 도왔다. 덕분에 새롭게 살게 된 서울 지리와 역사를 익혀갔다.
 
연구소를 다니며 틈틈이 서울 곳곳을 가볍고도 경쾌하게 돌아다녔다. 아는 사람의 소개, SNS서비스 등을 통해 서울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과 사람을 만나볼 수 있었다. 몇 달간 빼곡한 일정 속에 살았다. 어떨 때는 내가 다양한 삶을 접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열심히 돌아다녔다. 집회부터 클럽까지 어디든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가보았다. 하루나 이틀 가보는 것으로 그만인 곳도 있었고, 어떤 곳에 가서는 인턴이나 자원 활동을 자청하기도 했다. 그렇게 다니다가 만나게 된 사람들과 각별한 친구 사이로 이어지기도 했다.
 
마을에서 들어 온 것보다 서울은 살만 했다. 서울에 오기 전 마을 친구들에게 나는 농촌+도시 융합 쥐가 되 보이겠다며 우스갯소리로 말하고는 했다. 쥐라고 표현하는 것은 동화 '시골쥐와 도시쥐'가 생각나서였다.

▲ 햇빛부엌 소울푸드 인디언수프 나는 인디언숲이라고 부르곤 한다 ⓒ박푸른들 
 
새로운 문화를 긍정적으로 만나는 허니문 기간인 4개월 보내고 나니 매번 드나드는 곳은 세 곳 정도로 정해지게 되었다. 평소 엄두조차 내지 않았던 커피와 요리를 배우고 싶어서 서교동에 있는 커뮤니티 카페인 햇빛부엌의 인턴을 하게 되었다. 햇빛부엌은 밥과 커피 냄새가 그윽하게 나는 따뜻한 부엌 같은 곳이다. 요즘도 건강한 음식과 따뜻한 분위기로 일주일에 두 번씩 몸과 마음에 위로를 받고 오곤 한다.
 
그리고 갖은 편견에서 나부터 좀 자유롭고 싶어서 인권단체 자원 활동을 하고 있다. 인권 의식도 부족하고 허술하기까지 해서 갈 때마다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다니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잠시 쉬고 있지만 일주일에 한번 씩은 군고(북)모임에 나가 춤을 추기도 했다.
 
서울에서 때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돕기도 했다. 예를 들면 텃밭 보살피는 일은 내가 손쉽게 도울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반갑고 기분이 좋아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내가 협소하게 알고 있는 삶의 형태에 나를 끼워 맞추지 못해 열등감을 키우고 싶지 않았다. 대신 삶의 다양성을 접하고 상상력을 넓히고 싶다. 그리고 진심으로 나의 삶과 다른 이의 다양한 삶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싶다.
 
종종 주변 친구들은 내게 도대체 이런 다양한 모임 등을 어떻게 알게 되는 것이냐고 물어온다. 나는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알아보는 스타일은 아니다. 다만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신나게 말하고 다닌다. 그럴 때면 알음알음 알게 되는 좋은 기회가 많이 생겼다.
 
그렇게 서울에서의 첫 겨울, 봄, 여름, 가을을 보냈다.
 
서울에서 만난 작은 공동체  

▲ 화분갈이를 해준 다음 각 식물 생장조건을 소개해주기도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도울 때면 괜스레 으쓱해졌다     ⓒ 박푸른들 
 
갓 서울에 와서는 2주 동안 친척집에 머물렀다. 그리고 사돈 언니 오빠가 사는 곳인 양천구로 이사를 왔다. 같은 모양의 빌라가 촘촘히 서 있는 곳이었다. 집 가까이에는 매일 열리는 장이 있고 마트도 있었다. 또 프랜차이즈 빵집과 카페도 있고 멀지 않은 곳에 개인이 운영하는 빵집도 꿋꿋하게 있는 그런 동네로 이사를 왔다. 그들과 평소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내게 선뜻 같이 살자고 손을 내밀어주었다.
 
언니는 10년, 오빠는 8년 전 지방에서 서울로 일과 공부를 하러 왔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고 지금 서울에 정착했다고 했다. 당시 받은 도움을 이제 내게 전해주고 싶다고 했다. 고마운 일이었다. 그렇게 2월 중순부터 지금까지 호탕한 언니, 세심한 오빠, 소심한 고양이 두 마리 그리고 나 이렇게 다섯이 한 집에 살게 되었다.
 
중간 중간 새 가족이 들어오기도 했다. 3월부터 6월까지는 내가 아는 일본인 친구와 함께 오밀조밀 모여 살기도 했다. 그리고 지방에서 서울에 놀러 온 각자의 친구들이 잠시 동안 머물다 가는 집이기도 했다. 그런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서울 작은 공동체에 살고 있다.
 
내 안의 소리와 나만의 리듬을 찾아서
 
4개월가량 서울에서 지냈을 때 문득 '이제 허니문 기간은 지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모든 것들이 긍정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내가 처한 상황을 지금 보다 더 나은 상황으로 만들기 위해 애쓰기 시작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허니문 기간 이후 한동안 몸과 마음이 혹독하게 아팠다. 마을과 스승들에게 정서적 독립을 하고 싶다고 누누이 말해왔다. 하지만 실제로 멀어지는 느낌이 들어 외롭고 두려웠다. 그러다보니 점점 비슷한 이상향을 가진 사람들만 만나려고 드는 나를 발견했다. 또 내가 서울에다 의존 할 수 있는 제 2의 마을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다.
 
문득 서울로 가는 독립행 기차를 타기 전 엄마가 마지막으로 내게 해준 말씀이 떠올랐다.
 
“어디까지 가고, 무슨 일을 하고는 중요한 것이 아니야. 삶을 살며 소명을 찾는 일이 중요해. 소명은 보이스라는 뜻이 있대. 내 안의 목소리를 들으라는 거야. 그러려면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길 수도 있어야 해.”
 
터닝 포인트는 생각보다 아팠다. 나는 그동안 서울에 온 것 자체가 터닝 포인트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내게 터닝 포인트는 허니문이 끝난 후부터 지독하게 외롭고 두려운 시간부터였다.
 
나는 그동안 주변 스승들이 강조하는 공적인 삶, 땅에 발을 붙이는 것의 중요성 등에 공감했고 열심히 귀 기울여왔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처럼 보이고 싶어 했다. 그렇게 주변사람들의 맞는 이야기와 삶에 신경 쓰면 쓸수록 내 안의 소리를 듣는 일에는 점차 소홀해졌다. 그래서 내가 약해질수록 강해보이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온 몸이 힘을 잔뜩 주고 공적인 것이 뭔지도 잘 모르면서 공적인 척, 땅에 발을 붙이는 것의 의미도 잘 모르면서 현실적인 척하게 되었다. 기억을 더듬을수록 부끄럽다.
 
이제부터라도 내 안의 소리를 듣고 나를 인정하는 것에 집중해보려 한다. (박푸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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