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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로 간 한인 간호사들의 삶
[여성주의 저널 일다] 독일사회 50년 노동이주의 역사와 현재③ 
 
유럽 최대 이민국이 된 독일의 노동이주 역사와 정책, 이주민의 현실과 독일 사회의 변화를 들여다보는 기획 기사를 4회에 걸쳐 싣습니다. 결혼이주를 통해 생겨난 다문화 가족이 최근 몇 년 급증하고, 외국인노동자 정책에 대해 인권침해 논란이 제기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독일의 경험은 ‘국제이주’에 대한 이해를 돕는 소중한 자료가 될 것입니다.
 
필자 정용숙님은 연세대학교 사학과에서 독일사를 전공하고, 독일 보훔 대학교에서 ‘20세기 후반 노동자 가족의 사회사’에 대한 박사 논문으로 2011년 보훔 대학교 사회운동연구소가 수여하는 우수논문상을 받았습니다. 현재 한국에 돌아와 연세대 사학과에 출강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일다> www.ildaro.com
 
경제개발 역군? 정권의 희생양?
 
한국 정부는 1959년부터 1976년까지 간호사 1만723명, 1963년부터 1977년까지 광부 7천936명을 서독에 파견했다. 일찍부터 외국으로 국민을 내보내는 일에 열심이었던 정부는 1962년 해외이주법을 만들었고, 독일 정부에도 인력 수출에 대한 제안서를 수시로 보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간호사와 광부들이 왜 머나먼 독일까지 갔는지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정부가 파독 간호사와 광부들의 임금을 독일 은행에 강제 예치하는 조건으로 상업차관을 들여왔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차관담보설’의 출처는 1961년 12월 상업차관 교섭을 위해 독일을 방문한 정래혁 상공부장관을 수행했던 백영훈 박사의 회고록이다. 백영훈 박사는 독일 에를랑엔 대학에서 공부했고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인물이다. 그는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에 깊숙이 관여했고 차관교섭의 독일어 통역관이었다.
 
백영훈씨는 『아우토반에 뿌린 눈물』(한국산업개발연구원, 1997)에서, 미국의 무상 원조가 끊긴 상황에서 독일 정부와 차관 협상에 성공한 한국대표단은 이에 필요한 지급보증이 없어 고심하다 독일 노동부 직원의 아이디어로 지급보증 대신 광부 5천명, 간호사 2천명을 파견하는 조건으로 3천만달러 차관을 받을 수 있었다고 썼다.
 
그 즈음 한국 정부가 서독에서 1억5천만 마르크의 차관을 들여온 것은 사실이다. 이 이야기는 파독 간호사와 광부들 스스로도 그대로 믿게 됐고, 전기 작가이며 기자인 김용출이 독일 현지 취재와 인터뷰를 통해 엮은 에세이집 『독일아리랑』(에세이퍼블리싱, 2006)에서도 그대로 인용되며 정설처럼 굳어졌다.
 
차관담보설은 파독 한인 노동자들의 이미지를 극적으로 만드는 데 한몫 했다. 간호사들이 이국 땅에서 시체 닦는 일까지 했다는 근거 없는 이야기와 만나,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은 국가의 차관에 묶인 “임금노예”로 규정되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강의 기적”에 밑거름이 된 “희생”이 강조되기도 했다. 그것은 또 그들을 보내 한국 경제발전의 물질적 토대를 획득해 낸 박정희 정권의 “성장 신화”로도 연결되었다.
 
한국 간호 인력의 독일행 

 ©나혜심 『독일로 간 한인간호여성』(산과글, 2012)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파독 간호사와 광부의 임금을 담보로 상업차관을 들여온 사실이 없으며, 시기적으로도 파독이 이뤄진 시점과 차관 제공 논의는 맞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역사학자인 나혜심 교수(성균관대학교 문과대학)는 이 점을 사료를 통해 뒷받침하는 연구서 『독일로 간 한인간호여성』(산과글, 2012)을 최근 펴냈다.
 
그는 독일 코블렌츠 연방 사료보관소에서 독일 노동청과 관련 기관들의 공문서를 뒤졌지만, 195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광부 5천명, 간호사 2천명이라는 대규모 노동 이주와 관련된 체류허가 문건이나 고용허가서 등은 나오지 않았다고 썼다. 또 차관 협상 전인 1959년부터 이미 간호학생들이 독일에 가 있었으며, 그 어느 때건 노동 문제를 관할하는 두 나라 정부 사이의 협정은 맺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에 차관 회담보다 10개월 앞선 1961년 1월 31일, 주한 독일 대사관에서 열린 미국 경제원조기구와 한국 상공부의 회동에 대한 독일 측 보고서를 찾아냈다. 이 회견이 아마도 광부 파견에 대해 최초로 논의된 자리일 것이라 짐작된다. 독일 측 참석자가 독일 정부에 올린 보고서에는, 독일로 광부를 파견하자는 제안이 미국에서 왔는데 그 제안을 수용한다면 독일로서는 추가 비용 없이도 한국 경제를 도울 수 있으니 긍정적으로 검토해 달라고 쓰여 있다.
 
간호 인력 송출은 1959년 천주교 계열의 독일 선교단체에 의해 시작되었다. 간호학생 자격으로 파견되어 3년간 직업교육을 마친 후 시험을 거쳐 정식 간호사가 되는 과정이었다. 나중에 파독 간호사들이 간혹 “고아 출신” 이라고 오해 받게 된 것은, 초기 간호학생 파독을 선교단체가 주도했던 데 기인한다. 이 단체들은 한국에서 전쟁고아를 위한 시설도 운영하면서 간혹 여자아이들에게 성직자 교육을 시키기 위해 독일로 데려갔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1966년부터는 한국에서 간호학교를 나온 간호사들이 독일에 파견되기 시작했다. 마인츠 대학병원 소아과 의사로 있으며 1966년부터 1970년까지 대규모 간호 인력의 독일행을 주선했던 이수길 박사의 회고록 『한강과 라인강 사이에 무지개 다리를 놓다』(지식산업사, 1997)에 이와 관련한 내용이 나온다. 이수길 박사는 독일 병원의 간호 인력 부족 문제와 한국의 높은 실업률을 해결하기 위해 그 일을 진행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한국 해외개발공사로 담당이 넘어갈 때까지, 이수길 박사는 다섯 차례에 걸쳐 정식 간호사 628명과 간호학생 40명을 독일 병원에 취업시켰다.
 
울면서 했던 노동
 
『독일로 간 한인간호여성』을 살펴보면, 독일로 떠난 간호사들은 당시 한국에서 중등학교까지는 마친 20대의 젊은 여성들이었다.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한국여성으로는 낮은 학력이 아니었다. 그런 그들이 독일의 병원에서 맡았던 업무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간호사의 전문적인 일인 검사 보조, 수치 관리, 주사 놓기, 의사 따라 회진하기 만은 아니었다. 병실 청소, 환자 용변 돕기, 변기 청소, 환자 씻기기와 이동 보조, 배식, 약 먹이기 같은 간병인의 역할, 또 간호사 식사 준비와 병원에 있는 수녀들을 돕는 일이 주어졌다.
 
당시 한국에서 ‘간호원’이란 교육받은 여성들이 가질 수 있는 이미지 좋은 직업이었다. 그러나 독일에서 “간호일”이란 심부름, 청소, 침대보 갈기, 창문 닦기까지 간호에 필요한 일 전부였다. 전통적으로 간호사는 육체적으로 고된 하층의 직업이라 기피 직종에 속했다. 정식 간호사는 간호보조원이나 간호학생에 비해 주사 놓기 등 전문적인 의료 일에 대한 권한을 갖고 있지만, 병동에 근무할 때는 그런 분업을 따질 겨를이 없이 있는 인원만으로 모든 일을 해내야 했다. 따라서 정식 간호사라도, 업무 자체는 간호보조원이나 간호학생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때문에 한인 간호사들은 근무 조건이나 일 자체에 만족도가 높지 않았다. 한인 여성들은 1959년부터 1966년까지는 간호학생으로 갔고, 그 후에는 간호보조원으로 출발했다. 정식 간호사는 아니라 해도 파견 첫 날부터 바로 현장에 투입되었다. 어린 나이에 낯선 이국 땅에 떨어져서, 익숙한 한국에서의 간호 장면이 아닌 생경한 독일 병원의 간호와 간병 업무에 내던져진 여성들이 당황했을 것은 당연하다.
 
의사소통이 어렵고 독일식 간호일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런 일들은 외국인 차별로 비쳤다. 화장실 청소를 시키는 독일 간호사에게 “꺼지라”고 소리지르기도 하고, 간호사들의 식사를 준비하다 말고 쟁반을 바닥에 내던지는 식으로 분노를 표출한 이들도 있었다. 한국에서는 독일이 한국 여성들을 데려다 “식모” 일을 시킨다는 비난도 나올 지경이었다.
 
“우리는 자기네가 필요해서 데려온 사람들”
 
언어가 서툴고 업무에 아직 적응이 덜 된 한인 간호인력에게 처음 주어진 일은 좀더 비전문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또 그런 약점을 이용해 독일인 간호사들이 힘들고 하기 싫은 일을 미루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변기 청소나 간호사 수발 등은 독일인 간호학생들도 실습기간에 하는 일이다.
 
또 당시 독일에서 간호 인력을 필요로 하는 곳은 병원뿐 아니라 요양시설, 양로원, 결핵시설, 호스피스 등이었다. 이곳에서는 주사나 투약 등 간호 전문적인 일보다 식사 준비, 침대 정리, 청소, 병자 배식 등 가사와 청소, 환자 돌보기가 주 업무다. 따라서 간호일 자체가 갖는 독일적 특성을 파악할 만큼 오래 일한 한인 간호 여성들은 자신들이 “차별 없는 직업 생활”을 했다고 평가한다.
 
간호 노동자로 독일 땅을 밟았던 여성들 중 많은 수는 이주자로서 자신들의 노동과 삶을 병원이나 동네에서 “대우 받고 살았다”고 회고하고 있다. 수건이든 옷이든 필요하면 달라고 해서 받았고, “아주 당당하게 살았다”. 자신들은 독일 사회가 필요로 해서 “밥 먹여주고 돈 주고 기숙사 주면서 데려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여성들은 독일에서 40여년간 간호사로 일했고 지금도 일하고 있다. 나혜심 교수는 장시간의 독일 정착 과정을 통해 한인 간호 노동자들의 독일 사회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가 달라진 부분이 있는 것 같다고 평가한다.
 
젊은 미혼 여성의 노동력
 
한국 간호사들의 독일행을 후진국에 대한 서독 정부의 배려와 호의로 보기는 어렵다. 1955년에 이미 외국인 고용을 시작할 정도였던 독일의 노동력 부족 문제는 1961년 8월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며 더욱 심각해졌다. 독일 병원은 지금도 만성적인 간호 인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지만, 당시에는 병동 폐쇄를 고려해야 할 만큼 위기 상황이었다.
 
그런데 경기 호황에 힘입어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초까지 서독은 사회복지국가로서 복지정책이 확장 일로에 있었다. 그만큼 병원과 요양시설, 그것을 담당할 인력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다. 한인 간호사들은 독일 노동시장의 절실한 필요에 의해 독일로 가게 된 것이다.
 
“손님 노동자”라는 말은 일정 기간 동안만 일을 하고 돌아갈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노동력은 사되 사람은 받지 않겠다는 외국인 고용정책의 원칙이 반영되어 있다. 또 이주노동자를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도도 들어 있다.
 
독일은 이주노동자를 받아들일 때 출신국, 나이, 성별, 직업 능력, 결혼 여부, 자녀 여부, 종교, 외모까지 다양한 항목을 꼼꼼히 따졌다. 한인 간호여성의 경우에 ‘미혼이고 아이가 없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간호 인력이 항상 부족한 상황에서 이러한 원칙이 지켜지지는 않았다. 한국에서 이미 결혼했고 아이가 있던 여성도 간호사로 독일에 왔다. 교육 수준이 높고 능력 있는 여성의 경우엔 고용주인 병원 측이 아이들을 데려오도록 종용하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미혼 무자녀’ 원칙은 애초에 왜 생긴 것일까?
 
독일 사회보장국가는 1950년대 말에 ‘모성보호법’을 도입했다. 출산장려금과 육아보조금을 지급할 뿐 아니라, 임신이 확인된 여성 피고용인은 해고할 수 없으며, 산전 산후 휴가를 보장하고 임금의 일정 부분을 지급해야 했다. 따라서 외국인 여성인력에 대해서는 미혼 조건을 설정해 둠으로써 이런 사회적 비용을 아끼고자 했던 것이다.
 
게다가 독일에서 고용 기간이 짧은 미혼의 피고용인은 임금 등급이 낮다. 이들은 가족 수당이나 자녀 수당은 못 받으면서 세금은 더 많이 낸다. 독일인 기혼 간호사들과 비교하면 실수령액 차이가 클 수밖에 없다. 이것은 외국인이라서 받는 차별이 아니라 임금체계와 사회복지구조 때문이었지만, 한인 간호사들에게는 임금 차별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한인 간호사들은 야간 근무를 기피하지 않았다. 간호사 일을 독일인들이 꺼리는 이유 중 하나가 야간 근무인데, 한인 여성들은 추가 수당이 붙는 야간 근무를 오히려 자원했다. 어차피 단기간 노동을 위해 독일에 온 만큼 여가시간에 할 일도 없으니, 초과근무 아니면 별도 아르바이트를 해서 그 시간에도 돈을 벌었다.
 
그렇게까지 부지런히 일해서 모은 돈을 고국의 가족에게 보내는 한국의 젊은 여성들을, 평범한 독일인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길을 선택한 “개척자”
 
2008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지원한 한국사 구술자료 수집 사업으로 ‘파독 한인여성 간호노동자들의 증언자료’가 만들어졌다. 여기에는 여성들 스스로 독일행을 결심한 다양한 개인적 동기가 실려있다. 집안의 경제적 어려움을 덜고 싶어서, 취직이 안 되어서, 잘 사는 나라에 대한 동경, 돈을 벌어 독일에서 공부하고 싶어서 등의 다양한 답변들이 나왔다.
 
나혜심 교수는 파독 간호사들에 대해 “가족 경제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수동적 여성”이라고 일반화하는 것을 경계하고, 그 시절 어린 여성들이 가졌던 감정과 정서, 꿈을 추구하는 자기애와 적극성에 주목한다.
 
무엇보다도 이미 주어진 사회적 조건들을 떠나, 새로운 환경에서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겠다는 결단과 의지가 이들의 독일행을 가능하게 했던 요인이었다고 본다. 뿌리를 뽑아 국경을 넘어 다른 땅에 다시 뿌리를 내리겠다는 것은 쉬운 결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독일로 떠난 간호여성 중 1/3은 3년 후 귀국했고, 1/3을 독일을 거쳐 미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로 떠났다. 그리고 나머지 1/3이 독일에 남아 오늘날 독일 거주 한인이주 1세대 여성이 되었다.
 
그러나 나혜심 교수는 독일의 한인 가정에 강하게 남아 있는 가부장적 측면과, 이를 인정하고 수긍하는 여성들의 태도에도 주목한다. 한인 광부와 결혼한 한인 간호사들은 “여자만큼 적응하지 못하고 테두리에 갇힌 남자들”에 대한 답답함을 호소했다. 또 독일 사회와 일상에 대한 이해도를 둘러싸고도 부부간 갈등이 발생했다.
 
그것은 광부와 간호사라는 직업의 특성과도 맞닿아 있다. 8시간 내내 지하 갱도에 고립되어 일하는 광부들에 비해, 간호사들은 독일인 환자들을 직접 대하고 공동체간호사로서 가정을 돌며 병자와 노인을 돌보면서 지역주민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한인 광부와 결혼한 한인 간호사들 중 일부는, 자기도 공부하고 싶었지만 남편에게 양보하고, 공부하는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가정 경제를 책임지고, 낮에 학부모 면담을 가기 위해 야간 근무를 하면서도 “남편의 맘에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는 말을 잊지 않고 덧붙였다. “역할이 미리부터 정해져 있으니까” 라든지 “자존심 잃어버리고 안 돼. 한국 남자들은 안 그래”가 그 이유였다.
 
모국의 사회와 문화는 변하지만, 이주민들의 문화적 정체성은 모국을 떠난 시점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한국 사회와 문화는 1960년대 이후로도 숨가쁘게 변했다. 그러나 이주여성들은 가정 경제를 본인이 책임지고 이끌어 오며 독일 사회에 적응하고서도 ‘전통’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또, 평생 부부가 바쁘게 일하느라 공동의 경험과 공동의 시간을 갖기 어려웠다. 감정적이나 정서적으로 한국에서 배운 대로 밖으로 풀기보다는, 안으로 삼키며 인내하고 살아가는 이주여성들의 짐은 무거울 수밖에 없다. (정용숙)

* 여성저널리스트들의 독립언론 <일다> 바로가기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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