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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는 장년층 레즈비언들의 삶과 진솔한 목소리를 담기 위해 ‘그루터기’ 회원들의 글을 5회 연재하였습니다. ‘그루터기’는 공동체를 지향하는 35세 이상 여성이반모임입니다. –편집자 주]

나는 장문의 글을 읽는 것도 힘들어하지만, 쓰는 것은 더더욱 힘들어하는 졸필임을 시인한다. 그렇지만 내가 ‘그루터기’에 들어와서 하고 싶은 이야기, 누군가는 공감해줄지도 모르는 나와 파트너의 이야기를 한다면, 내 손은 기꺼이 장문의 서술도 해낼 수 있음을 알기에 기꺼이 적어보기로 한다.

무중력상태인 우리의 존재감이 서글퍼질 무렵
 
작년 이 무렵, 예전에는 건성으로 넘겼던 서너 가지 일들에 대해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법들을 찾고 싶어졌다. 제일 먼저 고민한 것이 나와 파트너의 ‘이름 찾기’(나름 의미를 이렇게 부여하고 시작해 본다)였다. 나와 파트너는 친구, 동생, 직장동료 등등의 관계로, 정식 이름이 없이 그때그때 주변사람들에게 불리고 있었다.
 
그러나 ‘일반’인들과 함께 보조를 맞춰 살아가야 하는 ‘이반’(성 소수자)인 우리는, 이런 것에 큰 불편함을 느끼지는 못했다. 친구, 가족 어느 누구에게도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던 우리는 8년이라는 시간을 이렇게 호적(?) 없이 살았다. 그리고 가족관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또래 사람들과는 사뭇 달라 보이는 우리의 삶이 외롭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어느 때는 습관처럼 “혼자입니다” 라고 자신을 소개하게 되는 나를 보며, 이대로 가다가는 지쳐 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생기기 시작했다. 지상에 발을 딛고 살지만, 사회적으로는 무중력상태인 우리의 존재감이 서글퍼졌다고 할까? 이런 저런 생각에, 우리와 같은 사람들과 편하게 삶을 나눌 수 있는 모임을 찾고 싶었다.

 
온라인을 통해 접한 첫 번째 모임은 너무 어린 아이스럽다고 할까? 100명이 넘는 회원들 가운데 10여명 남짓 오프모임을 통해 먹고 마시고, 그날의 회비는 그날에 소진하는 회계를 보고는 확 실망이 밀려왔다. 거금을 모아 단체를 이끌고 기부도 하는 거창한 모임을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그날의 영수증처럼 그렇게 소비로만 관계가 끝나버릴 것 같았다. 내가 원하던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이후, 우연히 발견한 모임이 그루터기였다. 35살 이상이라는 안정된 나이와, 이 모임에서 커플로 존재해도 부담되지 않을 것 같다는 잠정적인 판단 하에 회장님과 인터뷰를 했다. 곧 그루터기 회원이 되었다. 지금까지 한번도 이런 모임을 가져본 적 없는 우리한테는 놀라운 시도였다.

 
세상이라는 텃밭을 함께 개간해나갈 동반자

 

"네가 자랑스러워" 오김승원 作

처음 모임에 나갔을 때 그루터기 식구들의 성정을 하나도 모르는 나로서는 설렘, 두려움 모두 있었다. 그렇지만 우주인이 아닌, 아름다운 동시대인의 모습을 한 그들에게 그날 무장해제되었다. 선후배의 모습에서 나를 찾을 수 있었다.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언니, 동생으로 자연스럽게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들이 앞으로도 줄곧 이어질 거라는 즐거운 기대감이 밀려왔다.

 
한 달에 한번, 물론 그 사이 공동텃밭을 일구는 시간이 있어서 좀더 가까워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우리는 우리들의 이야기에 목말라 있고, 우리가 보고 보여줄 삶에 목말라있다. 개성도 강하고 정도 많은 그루터기 사람들이기에, 모임이 마무리될 때쯤이면 늘 아쉽다. 온라인 카페 안에서 우리들의 이야기를 릴레이로 해보자는 이야기가 나온 것도, 그 짧은 만남에 대한 아쉬운 반격이었다.

 
그루터기 가족이 된 것은 불과 1년도 안됐지만, 나와 파트너는 그루터기 안에서 당당히 ‘커플’이다. 진정한 우리의 이름은 서로를 나누는 동반자다. 우리 둘을 너그럽게 바라봐주는 선배와 후배가 있어서, 그루터기 안에서 우리는 예전보다 더욱 서로의 존재감을 느끼고 소중하게 생각한다.

 
올해 그루터기가 시작한 작은 공동체사업인 ‘고구마 텃밭’을 성공리에 마친 지금, 모두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앞장서서 고생하신 선배, 후배들 모두를 존경한다. 초보 농사꾼들이 그저 모여라 하면 모이고, 땅을 파헤치는 모습이란…. 이게 우리의 거침없는 모습이다. 타인의 이목과 세상의 어떠함은 일단 우리가 개척해나가야 할 텃밭이다.

 
우리는 초보 농군에 불과하지만, 진실이 힘을 모으고 보여지는 역사가 있는 한 우리와 함께 그 텃밭을 개간해 나갈 많은 이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앞으로 우리 그루터기 모임이 이런 역할을 해줬으면 좋겠다. 진실이 모이고 넉넉히 바라봐주고 이끌어주는 그런 모임으로 말이다. 홀로 동떨어져 있다고 느끼는 외로운 누군가에게 말 그대로 ‘그루터기’(밑바탕이 되어주는 것)가 되어줬으면 한다.
 
우리의 삶이 질적으로 양적으로 풍요로워질 때까지 그루터기의 행보는 이어질 것이며, 우리는 기꺼이 동반자가 되려 한다. www.ildaro.com [여성주의 저널 일다] 재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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