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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족성폭력’ 특성 인정한 판결에 주목
<일다> 대구고법, 부녀관계 속 성폭력 피해자 정황 이해해 
 
친아버지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에 대해, ‘친족성폭력’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는 주목할 만한 판결이 나왔습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피해자보호시설 ‘열림터’의 활동가 나랑 님이 그 의미를 짚어봅니다. [일다] www.ildaro.com
 
성폭력피해자 보호시설 ‘열림터’에 살고 있는 A씨의 성폭력 가해자는 친아버지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A씨를 추행하다가, 중학교 때부터는 강간과 추행을 수 차례 반복했다. A씨는 성인이 된 후에야 자신이 겪은 일이 ‘성폭력’ 피해라는 사실을 알고 집을 뛰쳐나왔고, 이곳 열림터로 오면서 가해자를 고소했다. 그러나 친부는 가해 사실을 전면 부인하였다.
 
작년 2월, 1심에서 대구지방법원은 가해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올해 2월 열린 2심 선고공판에서 대구고등법원은 원심을 파기하고, 가해자에게 징역 7년과 신상정보 공개 5년을 선고했다. 공판 결과뿐 아니라, 판결문의 내용을 보면 재판부가 ‘친족성폭력’의 특성에 대해 이해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반가운 마음에 이를 소개하고자 한다.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얼만큼 인정할 것인가
 
다른 성폭력 피해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장기간 지속되어 온 친족성폭력 피해는 뚜렷한 증거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질 등에 외상이 있었다고 해도 24시간 이내에 검사하지 않는 한 상처가 발견되기 어렵다는 과학적 근거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폭력 사건에서는 ‘생존자 진술의 신빙성’을 중시하게 된다. 그러나 오랜 기간, 몇 차례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지속적인 피해를 입은 생존자는 정확하게 날짜나 장소를 기억하기 힘들다. 또 힘든 기억인 만큼 무의식적으로 기억을 지워버리거나, 기억이 뒤섞일 수도 있다.
 
1심 재판부는 A씨의 진술과 주변인들의 진술에서 약간의 오차가 있는 것을 문제 삼아 생존자의 진술에 ‘일관성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2심 재판부는 “십 수년 전의 일을 기억하면서 진술하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위와 같은 정도의 진술 불일치가 진술의 신빙성에 영향을 준다고 볼 수는 없다”고 반론하며 “진술이 매우 구체적이고, 상세하고, 일관성이 있다”고 보았다.
 
성폭력 생존자와 생존자 친구, 전 남자친구 등이 증언한 내용이 아주 상세한 내용에서는 일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전체적인 맥락에서 일관성이 있기 때문에 증거로 채택한 것이다.
 
반편 가해자 측은, 딸인 A씨가 대학에서 남자친구를 사귀면서 외박을 하고, 이에 본인이 간섭과 질책을 하며 용돈을 주지 않자 미운 감정을 갖게 되었으며, 외박으로 인한 아버지의 질책이 두려운 나머지 허위진술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피해 사실이 진실로 밝혀졌을 경우의 파급력 등에 비추어 볼 때, 위와 같이 피해자가 피고인에게 가지고 있는 불만이나 미움으로 인하여 또는 피고인으로부터 돈을 받아 내기 위하여 허위진술을 한 것이라고는 도저히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너무나 상식적인 판단이다. 어떤 여성이 가족과 단절되어 경제적, 정서적 지원이 끊길 것을 알면서도, 아빠에 대한 미운 감정 때문에 성폭력을 허위로 드러내어 고소한단 말인가?
 
재판부는 A씨가 남자친구와의 성관계 등에 대해 진술한 것을 두고, 관습처럼 여성의 품행 문제로 낙인 찍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에게 이롭지 않은 사실에 대하여도 적극적으로 상세히 진술하고 있다. 위와 같이 유불리를 따지지 않는 진술태도는 진술에 신빙성을 더해준다”면서, A씨의 용기에 박수를 보냈다.
 
‘NO’라 말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는 사회
 
가해자 측에서는, 성인이 되기 전까지 A씨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한 것을 강조했다. 2심 재판부는 이에 대해 “피고인은 피해자가 어릴 때부터 강한 힘을 행사하거나 협박하기보다는 피해자를 달래면서 때로는 사정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면서” 성폭력 가해를 지속했다는 점을 감안했다. 그리고 “피고인만이 피해자를 지켜줄 수 있다. (…) 피고인은 가족이니까 안전하고 끝까지 피해자를 지켜줄 것”이라고 주입시키면서 가해행위를 했다고 판단했다.
 
또한 남자친구와 할 일을 먼저 배우는 것이라는 둥 “왜곡된 성의식 주입으로 인해 피해자는 가해자와의 성접촉이 비정상적이고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을 명확하게 하지 못하였을 것으로 보인다”고 판결했다.
 
재판부가 지적했듯이 친족성폭력은, 가해자가 무력으로 생존자를 제압하기보다는 ‘사랑’을 위장하여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생존자는 말을 잘 안 들었을 경우에 가해자의 성폭력이 더 잦아질까 봐 두려워 가해자에게 순종하기도 한다. 생존자가 성인이 되어 명확하게 ‘성폭력’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가족이 아닌 누군가에게 말을 하거나, 집을 나올 수 있는 시점이 되기 전까지, 겉으로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원만한 관계처럼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가해자뿐만 아니다. 우리 사회의 성문화 역시 친족성폭력 피해를 인식하기 힘들게 만들고 있다. “성폭력이나 강간은 여자를 꼼짝 못하게 해서 때리고 강제로 관계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 아빠라도 나를 만져서는 안 되고, 나는 싫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배운 적이 없다.”
 
위와 같은 A씨의 법정 진술은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말라”, “어두운 골목길을 조심하라”로 시작되는 우리 사회의 성폭력 예방수칙이 친족성폭력 앞에서 얼마나 무기력한 공염불인지 알게 해준다. 우리는 ‘NO’라고 말하는 법을 가르쳐 준 적이 없으면서, ‘NO’라고 말하지 못한 성폭력 피해자를 비난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친족가해자에 대한 피해자의 ‘양가 감정’
 
성폭력 생존자가 가해자에게 갖는 이중적인 ‘양가감정’이야말로, 친족성폭력 문제에서 사람들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지점이다. 양가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경찰과 검찰, 재판부의 협소한 인식으로 이어져,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 또 다른 피해를 발생시키고 있다.
 
가해자들 역시 피해자의 양가감정을 이용한다. 이 사건에서도 가해자는 A씨가 자신을 향한 존경과 고마움을 표현한 이메일과 수첩 등을 증거로 제출했다. 2심 재판부는 “피해자가 피고인에게 표현한 위와 같은 사랑과 존경, 고마움 등의 감정은 진심인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가해 사실과 가해자에 대한 감정은 양립 가능하고, 양립 가능하다는 점이 오히려 더 자연스럽다”고 판단했다. 그 이유는 “피해자의 경제적, 정신적 후원자로서 피해자를 보호하면서 양육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고 (…) 피해자가 거부감이나 불쾌감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왜곡된 성의식 주입으로 인해 피해의식의 강도가 약하였”기 때문이다.
 
가해자가 친아버지인 경우, 피해자가 자신의 생존을 전적으로 의지한 사람이며 자기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사람이기에, 성폭력이 싫다고 해도 집을 뛰쳐나올 결심을 하기 쉽지 않다. 힘겹게 가해자와 분리된 후에도, 생존자는 가해자를 미워하지만 때로는 가해자를 불쌍해하며 고소를 망설이기도 하고, 자신이 가해자의 인생을 망쳐놓는 것은 아닐까 죄책감을 갖기도 한다.
 
이러한 정황은 “가해자가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싫지만, 저는 또 의지할 사람이 필요하고, 따뜻하고, 안전하고, 보호하는 그런 것을 원했는데, 가해자가 그런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라는 A씨의 법정 진술에서도 드러난다.
 
친족성폭력 생존자들에게 용기를! 
 
2심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외관상으로는 처와 자식을 부양하기 위하여 열심히 땀을 흘리고 (…) 지극히 평범하고 바람직한 삶을 살아온 사람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자신의 친딸을 성적인 욕구충족의 대상으로 삼아 (…) 자신의 비정상적인 욕구를 채운 피고인의 또 다른 얼굴이 숨어 있었다”면서 가해자의 이중성을 폭로했다.
 
친족성폭력을 행사하는 이가 아버지인 경우, 가해자는 가족 내에서는 절대 권력을 가지고 가족구성원 전체를 철저하게 통제하면서, 바깥으론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이는 경우가 많다. 주디스 루이스 허먼의 책 <근친성폭력, 감춰진 진실>(삼인, 2010)에서도 이러한 특성을 담고 있다.
 
“아버지는 한 치 의심할 여지없이 절대적이었고, 때로는 힘을 과시했다. 아버지는 또한 가족의 사교생활 중재자였고, 사실상 여성들을 가정 안에 고립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가족 내에서는 주로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반면, 외부인에게는 공감적이고 심지어 찬미를 받을 만한 사람으로 비치게 행동했다.”
 
대구고등법원의 이번 판결은 친족성폭력 피해의 정황과 맥락, 피해자가 갖는 양가감정과 가해자의 특성 등에 대해 높은 이해를 보여주어, 고소를 한 A씨에게 큰 힘을 주었다. 판결문을 분석하면서 친족성폭력 사건에 주되게 나타나는 특징을 이야기했지만, 물론 이것이 모든 사건에 해당하는 바는 아니다. 행여 이러한 특징을 갖지 않은 친족성폭력 생존자를 힘 빠지게 하는 것은 아닐지 염려스럽다.
 
부디 친족성폭력에 대한 이해가 높은 판결이 많이 나와서, 더 많은 친족성폭력 생존자들이 용기를 얻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나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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