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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혼여성, 동성가족도 소외되지 않는 병원을 꿈꾸다
[젠더와 건강] ‘살림의료생협’ 주치의 무영 인터뷰 


성차별 사회에서는 여성들의 건강 문제에 대한 접근에도 여성주의 시각을 필요로 합니다. 여성이 건강할 권리, 여성노동자들이 안전하게 일할 권리를 지키기 위해 활동하고 있는 연구자, 의료인 등을 만나 ‘젠더와 건강’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는 연재기사가 마련됩니다.

필자 박은지님은 <일다>에 여성들이 많이 경험하고 있는 증상 및 질병에 대한 정보와, 이를 예방하고 개선하는데 도움을 주는 신체활동의 효과에 대해 살펴본 기획연재 <신체활동과 여성건강 이야기>를 연재한 바 있습니다.  [일다] www.ildaro.com

‘살림의료생협’ 주치의 무영을 만나다
 

“2004년에 사람들에게 여성주의 병원을 만들고 싶다는 얘기를 했었어요. 그때 어떤 분이 ‘그렇다면 병원이 아니라 의료생협을 만들면 어때?’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병원은 의사가 만들고 소유하지만, 의료생협은 여성들, 여성주의자들, 그리고 주민들이 함께 만들고, 공유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여성주의적인 병원이 아니겠느냐’고 하셨죠. 그 말이 제게 큰 의미로 다가왔어요.”
 
작년 즈음부터 여기저기에서 <살림 여성주의 의료생협>에 대한 이야기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는 성황리에 창립총회를 마쳤다는 소식도 들렸다. 커져가는 궁금증 한 보따리를 가지고, 올해 9월 개원을 앞둔 살림의료생활협동조합(이하 살림의료생협)의 주치의 무영을 만났다.
 
살림의료생협이 탄생되기까지
 

“처음에는 막연히 뜻있는 여성들이 힘을 모아서 병원을 만들어야겠다고만 생각했지, 의료생협을 만들기 위해서는 지역운동을 기반으로 그곳에 사는 주민들과 협력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까지는 잘 몰랐지요.”
 
당시 의대생이었던 무영 씨가 꾸렸던 ‘여성주의 의료생협 준비모임’은 자연스럽게 의대생, 의사, 간호사, 아니면 보건의료분야에 관심 있는 여성주의자, 학자들로 구성되었다. 구성원들이 주민운동에 대해선 아는 것이 없었기에 야심차게 시작한 모임은 흐지부지하게 끝나버렸다.
 
사그라졌던 여성주의 의료생협의 불씨가 다시 지펴진 것은 그로부터 2년이 지난 후였다.
 
“2006년에 한창 비혼여성들과 만나서 ‘어떻게 하면 노후에 가족공동체가 없는 속에서도 우리끼리 잘 돌보면서 살 수 있을까?, 어떻게 지역주민들과 함께 잘 살 수 있을까?’ 이런 얘기를 하다가 다시 불이 지펴지게 됐어요."
 
2006년은 ‘언니네트워크’가 비혼여성을 주제로 계속 토론과 발표를 하고, 모여서 공부도 하던 때였다. 그때 무영은 당시 언니네트워크 활동가였던 어라를 만났고, 이 둘의 만남이 살림의료생협이 탄생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어라와 제가 의기투합했던 것이 제일 처음인 것 같아요. 저는 여성주의 병원을 만들고 싶어 했고, 어라는 비혼여성의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고 싶어 했고.” 
 

▲ 의대생이었던 무영(사진 왼쪽)과 언니네트워크 활동가였던 어라(사진 오른쪽)가 여성주의 의료생협을 만들기로 의기투합한 후 떠난 남미여행에서.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함께 남미로 떠났고, 7개월에 걸친 여행기간 내내 서로가 꿈꿔왔던 마을과 병원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그리고 여행에서 돌아온 둘은 서울시 지도를 쫙 펴놓고 비혼여성이 제일 많이 사는 구가 어딘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여러 자료들을 찾아가며 다른 사람들과도 논의해본 결과 마지막 후보 두 곳이 결정됐다. 마포구 그리고 은평구였다.

 
“마포가 여성 1인 가구 비율이 높더라고요. 그런데 마침 성미산 공동체에서 의료생협을 준비한다는 소리가 들렸고, ‘그럼 마포는 그쪽에서 준비하는 게 맞겠다. 우리는 다른 데로 가자’고 했죠. 그때 굉장히 여러 군데서 동시에 은평을 추천하셨어요.”
 
마치 운명처럼 여러 가지 우연들이 겹쳐 은평구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마침 살림이재단 건물을 신생 여성단체들에 거의 무료에 가깝게 빌려주신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리고 은평에서 시민사회운동을 하시는 선생님들도 많이 만나 뵈었는데 대부분이 여성이었고, 그분들 중에는 비혼으로 살아오면서 지역운동을 해왔던 분들도 많이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우리가 하려는 일에 대해 말씀드리니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다 받아주셨어요.”
 
현재 살림의료생협 조합원 구성은 절반 정도가 지역주민들이고, 나머지가 여성주의자들이라고 한다. 지역주민들에게 다가가는 과정이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이들을 모을 수 있었을까?
 
“저희가 건강강좌 나갔을 때 보시고 가입한 분들도 있고, 지역신문인 ‘은평시민신문’을 정기구독 하는 애독자들도 많이 가입하셨어요. 또 예전부터 은평에서 시민사회단체 운동하시던 분들도 많이 계시고. 그리고 저희가 거리에 좀 많이 나가요. ‘지역에 무슨 행사가 있다, 어디 벼룩시장이 열린다’고 하면 전부 다 쫓아가서 좌판을 벌이고, 하하.”
 
왜 ‘여성주의’ 의료생협인가?
 
▲ 살림 의료생협 조합원 절반은 지역주민들이다. 길거리 건강강좌 등을 통해 지역주민과 적극적인 소통을 시도한 결과이다.   

 
“저는 처음에 비혼여성들의 삶에서부터 여성주의 의료생협을 출발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아무래도 가족공동체에 속해있는 사람들보다는 사회적인 안전망이 약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이들이 안전하고,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커뮤니티를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이것이 ‘여성주의’ 의료생협이 필요했던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여자 나이가 사오십이면 당연히 결혼을 하고, 아이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나이대의 여성이 병원에 가면 의사가 딱히 성관계를 해봤는지, 배우자가 있는지를 묻지 않는 경우도 많다. 무영은 이런 사례들을 접하면서 가족관계에 속해있지 않은 여성들에게도 맞춤 의료서비스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특히 성소수자들 같은 경우에는 더욱 더.
 
“산부인과에 갔을 때 의사가 섹스를 해봤는지 묻는 의미는 질 안에 검사 기구를 넣겠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레즈비언들 중에는 성관계는 해봤지만 삽입섹스 경험은 없는 사람들도 많이 있거든요. 이런 경우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되는데, 보통은 의사가 결혼을 했는지도 물어보지 않는데다 결혼하지 않았다고 말해도 ‘그럼 성관계는 가져봤냐’고 묻죠.”
 
이 질문에 ‘성관계는 가져봤다’고 대답하면 일반 검사 기구를 사용하는데, 이 경우 심한 통증이 유발되고, 다칠 수도 있다고 한다. 사실 아무리 의사 앞에서라도 본인들이 처한 특수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커밍아웃을 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불가피한 경우에 어쩔 수 없이 말하거나 아니면 끝까지 숨기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렇게 성소수자를 배려하는 정신을 가지고 있는 병원이 생기는 것은 참 환영받을만한 일이다.
 
또한 살림의료생협은 동성가족, 반려동물이 함께하는 가족 등 다양한 공동체 가족을 지지하고 있다. 다만, 의료기관 보험진료의 경우에는 살림의료생협이 아닌 건강보험공단에서 직접 조합원 및 혈연가족 여부를 판단하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조합원의 가족’이 아닌 ‘비조합원’으로 분류된다.
 
“비록 법에서는 안 되더라도 우리 조합이 자체적으로 조합원 가족 할인혜택 같은 것을 만들었을 때 그 혜택은 혈연가족뿐만 아니라 동거가족도 동일하게 받을 수 있도록 하려고 해요. 다양한 공동체 가족을 지지한다는 조합의 의지인 것이죠.”
 
조합원이 원하는 모습의 병원으로
 

살림은 올해 9월경에 병원 개원을 앞두고 있다. 처음에는 의사 한 명, 간호사 한 명 정도의 작은 규모로 시작해서 점차 확장해갈 예정이다.
 
“올해는 이렇게 시작하고, 내년이나 내후년쯤에 치과를 개원하려고 해요. 그리고 동물병원도 사업소로 하나 내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개원에 앞서 모든 준비과정 속에 조합원들의 생각과 의견을 반영할 수 있도록 여러 번의 조합원 참여회의를 할 예정이라고 한다.
 
“제가 일본의 ‘미나미 의료생협’이라는 곳을 다녀왔었는데, 여기는 6만 3천여 세대의 조합원을 가지고 있는 굉장히 큰 의료생협이에요. 종합병원도 두 개나 가지고 있고요. 이 미나미 의료생협이 5년 전에 ‘원래 있던 낡은 종합병원을 팔고, 300병상짜리 새 병원을 짓자’고 했을 때 ‘천인회’라는 회의를 마흔 다섯 번을 했대요.”
 
‘천 명이 모여서 하는 회의’라는 뜻의 ‘천인회’는 병원을 짓기까지 5년 동안 45번에 걸쳐 진행됐다. 이 과정에서 돈은 어떻게 마련할지, 어디로 갈지, 그리고 인테리어는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세세한 부분까지 모든 것을 조합원들과 함께 이야기를 했고, 마침내 모두가 동의하고 원했던 병원을 세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저희도 조합원뿐만 아니라 조합원이 아닌 분들도 관심이 있다면 참여할 수 있는 회의를 하면서 병원을 만들려고 해요. 이건 가칭인데 ‘꿈꾸는 개원 애벌레’라는 회의를 개원 전까지 7번 잡아놨어요. 여기서 우리가 꿈꾸는 병원에 대한 상을 얘기하고, 그것을 현실화 할 방안들을 찾아보려고요."
 
여성주의 의료생협, 넘어야 할 산은 많지만…
 
▲ 살림에는 산행, 걷기, 통기타, 방송 댄스, 반찬 만들기 등의 다양한 소모임이 있는데 꼭 조합원이 아니더라도 참여할 수 있다.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어린 시절 친구들과 재밌게 했던 놀이가 떠올랐다. 친한 친구들끼리 옹기종기 앉아 하얀 종이에 우리가 살고 싶은 집과 마을을 그리면서 즐거워했던 기억. 지금 내 앞에 어린 시절의 나처럼 즐겁게 그림을 그리는 어른들이 있고, 게다가 정말 그림 속의 마을을 현실로 만들고 있다니!
 
‘꿈꾸는 개원 애벌레’ 외에도 살림에는 산행, 걷기, 통기타, 방송 댄스, 반찬 만들기 등의 다양한 소모임이 있는데 꼭 조합원이 아니더라도 참여할 수 있다. 또 매월 넷째 주 토요일에는 아프지 않아도 본인의 건강을 주치의와 의논할 수 있는 주치의 상담 사업이 있다고 하니 무성의한 의료기관에 상처를 받았던 경험이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참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다.
 
2011년 말을 기준으로 한국에 있는 의료생협은 약 220여개. 이중 200여개는 가짜 의료생협이다. 개인의 영리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사무장 병원들이 간판을 의료생협으로 바꿔달고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난 16일에는 보건복지부와 공정거래위원회가 8개 의료생협을 공동 조사한 결과 모든 생협에서 불법행위가 적발되었다는 발표가 있었다. 의료계에서는 비조합원을 상대로 진료하는 행위를 철저히 단속해야 한다는 강경한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살림의료생협이 앞으로 부딪히고, 넘어야 할 산은 많아 보인다. 하지만 무영과 어라라는 두 사람이 만나고, 여러 우연이 겹쳐 은평에 자리를 잡게 된 것처럼 이루어질 일은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꿈꾸는 애벌레들이 꿈꿨던 병원은 어떤 모습일지. 다가오는 여름이 기다려진다.  (박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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