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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되지 못한 역사가 지역에 남긴 상처들
<박혜령의 숲에서 보낸 편지>2. 살아있는 근현대사 교과서 
 
<일다>에 “박혜령의 숲에서 보낸 편지” 연재가 시작되었습니다. 경북 영덕 한 산골마을로 귀농하여 농사짓고 살아가는 박혜령씨가 ‘대자연 속 일부분의 눈’으로 세상을 향해 건네는 작은 이야기입니다. 개발과 성장, 물질과 성공을 쫓아 내달려가는 한국사회에 ‘보다 나은 길이 있다’며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편지”가 격주로 독자들을 찾아갑니다.  <편집자 주- 일다> www.ildaro.com

청산되지 않은 아픈 역사는 내 이웃의 삶 속에 살아서 그 아픔이 대물림되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의 정신은 아직도 군부독재 시절의 1970년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지배자들의 논리에 굴복하며 그 아래 엎드리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동시대를 살고 있는 나는 무엇으로 그 상처와 공포를 보듬고 함께 극복할 것인가?

한 산골마을에 드리운 역사의 그늘
 
 
2002년 숲이 울창하던 여름, 말로만 듣던 창수령을 향하던 길에 우연히 이곳을 들렀다. 몇 남지 않은 집들이 산 아래에 드문드문 서 있고 밭에는 처음 보는 작물들로 가득했던 풍경. 그것들이 주는, 삶에서 필요한 생산의 기쁨과 진지함이 베어 나오는 그 느낌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시간이 한참 흐르고도 그 풍경을 잊을 수 없어 그 해 추위가 매섭고 눈송이 날리던 겨울 한가운데에 이곳을 다시 찾았다.
 
산에는 날리던 눈들이 나무마다 내려앉으며 겨울의 호흡을 하는 듯 하고, 여름의 싱그러움 대신 장작 타는 냄새로 노동의 고단함을 위로하고 있었다. 집마다 연통에서 타오르는 뽀얀 연기는 마을에 생명을 불어 넣으며 보는 이에게 대가 없는 평화를 선물하는 듯 했다.
 
▲ 풍력발전기가 들어서긴 전의 낙동정맥(洛東正脈)     ©박혜령  

 
이듬해 봄 우리는 서둘러 이곳에 정착했다. 이 산중에서 인생을 더 깊은 향기로 채우고 싶었다. 이젠 마을의 흔적조차 사라질 듯 드물게 자리한 집 10여 채가 고작인 이 골짝은 생각보다 많은 역사와 상처를 가진 곳이었다.
 
조선중후기 양반들의 종가가 크게 자리한 이곳은 직접 가마를 만들어 기와를 굽고 옹기를 구웠다 한다. 그 당시 적지 않은 노비와 농민들이 여기에서 힘들게 민초의 삶을 이어갔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 거사가 있었던 곳으로, 지금도 독립운동유공자가족으로 보훈비를 받는 가족이 주위에 드물지 않게 있을 정도로 활발한 항일운동이 일어났던 곳이다.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옥살이를 하였고 죽어나가거나 불구가 되기도 하였다. 일본의 압제에 항거한 지역민들의 조상들은 대부분 농민이나 천민이었으며 유명한 항일무사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처자들은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일찍 혼사를 서둘렀다. 지금은 돌아가신 이웃집 할머니도 그 이유로 어린나이에 시집와 고생이 많았다고 회고하였다.

 
그 후 한국전쟁을 거치며 이곳은 많은 빨치산들의 은거지였고 수차례의 토벌로 쑥대밭이 되었다고 한다. 수많은 민초들이 이념갈등과 권력투쟁의 틈바구니에서 희생되었다. 말 몇 마디 나누었다는 이유로 죄 없이 빨갱이로 몰려 잡혀가기 일쑤였고, 전쟁 통에 군인으로 강제동원에 내몰렸다. 그 난리를 피하려고 산언저리를 숨어 다니는 청년들이 많았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난 후, 전쟁 통에 재산과 땅을 잃은 사람들은 산으로 들어가 화전을 일구었다. 많은 가구가 산중에서 농사지으며 생활했다고 한다. 그 후 1970년대에 정부에서 이주를 권장하면서 대부분의 원주민들은 산 아래로 나오게 되었고 지금의 마을들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그 중 몇몇 가구는 산중턱이나 산정상부의 토지를 유지하며 그 곳에서 가능한 농사에 적응해 생활을 이어가기도 하였다.
 
100여 년 동안 일제와 한국전쟁, 그리고 군부독재를 지나면서 이곳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 반대하는 말을 쉽게 하는 사람이 없어졌다. 행여 무슨 말이라도 하려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갈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충고까지 덧붙이기도 한다. 1970, 1980년대의 이야기가 아니다. 2011년 현재의 이야기이다. 역사의 경험 속에서 권력에 대한 공포는 ‘굴복하고 스스로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살아남는 방법’이라는 것으로 이들의 뼛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국가 정책과 기업의 이윤추구를 위해 쫓겨나는 화전민 
 
▲ 풍력발전기 바로 앞의 감자밭 - 보상 한 푼 없이 풍력기의 소음과 진동으로 인한 수확 감소 등을 감수해야 한다.     ©박혜령  

 
전쟁과 권력의 압제를 피해간 땅이 한반도 어디에 있을까? 이 첩첩산중도 역사의 수레바퀴는 지나가고 아픈 시대의 흔적과 상처를 지역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겼다.
 
그 중 한 농가의 이야기는 나를 세상 속으로 나오게 한 두 번째 계기이기도 하다. 그의 부모는 한국전쟁 후 산중으로 들어간 화전민 중 한 사람이다. 긴 세월을 그 곳에 뿌리박고 살면서 인생의 대부분을 지내왔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업체에서 친환경 에너지 생산을 위한 풍력기를 세우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해당 업체와 공무원들이 주민동의와 협조를 구하며 인근 동네와 주민을 찾아 수차례 방문하였다. 거대한 풍력기가 들어서게 되면 평생을 바쳐 일군 밭에 피해가 오게 될 것이 자명했다. 우선 눈에 띄는 주민피해로는 소음과 불빛, 그림자 피해 등이 있다.
 
실제로 공사가 진행되자 계곡수를 이용하는 주민들의 취수원이 오염되고, 산정상부의 희귀꽃 군락지가 검토도 하기 전에 굴착기에 쓸려 흔적조차 찾기 힘들어 졌다. 공사를 맡은 업체에서는 주민들이 힘들게 화전으로 일군 밭을 길로 사용하려 한다며 터 달라 하였다. 밭주인이 동의하지 않자 경찰을 대동하고 밀어붙이기 식으로 풍력기를 실은 대형트럭들을 밀고 올라왔다. 분노가 폭발해 몸싸움에 휘말린 이 화전민 가족은 현재 폭력행위 등으로 재판중이며 아마도 전과자를 면하기 힘들 것이다.
 
게다가 불하(拂下: 국가 또는 공공 단체의 재산을 개인에게 팔아넘기는 일)가 예정된 화전산밭은 측량 후 위치 불일치로 소유권과 일체의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 밭에 대한 피해를 주장하는 부자는 도리어 남의 땅을 불법 점유한 신세가 되었다. 수십 년을 대를 이어 농사지은 땅은 해당 지방자치단체의 것이니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고 한다.
 
전쟁 통에 모든 재산을 잃고 평생을 바쳐 일군 땅과 삶이 기업의 이익과 행정편의, 국가권력의 논리 앞에서 순식간에 전과자와 사회부적응자로 전락한 채 지역사회에서 외면당하고 있다. 개인의 삶이 송두리째 파괴되는 가운데도 이웃들은 함구하고 혹시 불똥이 자신들에게 튈까 염려하며 기피한다. 그는 일련의 일들로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이민을 생각할 정도로 이 사회에서의 생활을 힘겨워 하고 있다.
 
나라를 빼앗긴 것도, 이념의 갈등과 전쟁이 아니어도 기업의 이윤추구와 국가가 말하는 ‘대의’로 인해 개인의 삶과 권리와 자존은 무참히 짓밟힐 수 있다.
 
새로운 지역문화를 만들기, 이제 시작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투쟁과 농민봉기가 활발했고, 한국전쟁에서도 이념 갈등을 거르지 않고 치르며 한국사의 중심에 있었다는 동해안 영해와 영덕 일원. 그러나 일제 강점기의 지역의 항일투사를 시해한 사람의 후손이 호적 세탁을 하여 버젓이 군수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하고, 전쟁 통에 강제동원을 피했던 지주들의 후손들은 여전히 부를 유지하며 지역의 유지로 살아가고 있다. 그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과 소외의식은 사람들의 의식저변에 넓게 자리하게 되었다.
 
바로잡지 않은 역사는 책속에 글자 몇 줄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 그대로 사람들의 뇌리와 삶에 선명하게 남아 현재를 사는 이들에게 불치의 트라우마로 남는다. 역사가 상처와 흉터로 남지 않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선에서 지속적인 위로와 공론화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상처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잘 견디고 이겨내 온 자신들을 긍정하고 미래를 열 힘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이러한 태도가 결여되어 있다. 이는 어떤 문제에 부딪힐 때 함께 극복하고 해결하는 공동체적 방식을 앗아갔다. 대신 혼자 벗어나겠다는 개인적 해결방식이 폭넓게 자리하게 되었다. 혼자라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동물적 생존본능이지 않을까 한다.
 
▲ 풍력발전기가 설치되기 전 화전 풍경     © 박혜령 

 
이 지역은 1990년대에 들어서야 겨우 전기가 들어오고 동네길이 포장된 지도 불과 수년전이다. 지역의 시민단체에서 수십 년 농민운동을 이어 왔지만 남아있는 것은 정부보조금에 더하여 갚아야 할 융자금과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그간의 활동뿐이다. (그나마도 잘못하면 혜택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걱정으로 할 말 한마디 못하고 전전긍긍이다.) 누구도 따뜻한 위로 한마디 하지 않고 남은 것은 늙어 버린 자신과 도시로 이탈해 가는 이웃들, 그로 인해 사라져 가는 고향에 대한 서글픔뿐이다.
 
게다가 귀농을 결심하고 들어온 타지인에 대한 지자체와 주민들의 시선도 그리 따스하지 않다. 지자체는 도시물 먹은 주민들이 불평이 많고 요구하는 것이 많아 골치 아프다는 식의 속내를 드러낸다.
 
지역사회의 활성화는 경제적 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지역의 문화와 역사가 이어지고 풍성해 질 때 가능하고 의미가 있다. 그것이야 말로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는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속한 지역의 역사와 현재를 이해 하는 바탕위에 설 때 다양한 지역 활동은 비로소 그 꽃을 피울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작은 마을과 지역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며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작은 마을부터 시간이 걸리더라도 제대로 소통하고 자유롭게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문화를 형성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부조리한 권력에는 저항하는 것이 정당한 일이라는 인식을 확산시켜가야 한다.
 
나는 마을회의에서부터 자주 토론하고 문제를 만들고 해결하는 문화를 확산시켜 작은 기적을 만들고자 한다. 지역주민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역사를 만들었는지 이해하고, 그 역사를 통해 자신들을 제대로 긍정하는 방법을 삶속에서 체득하도록 하고자 한다. 기적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작은 행동이 보다 큰 행동을 위한 길을 닦기 위한 징검다리가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박혜령 / 미디어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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