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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령의 숲에서 보낸 편지> 1. 산능선에 들어선 풍력발전기 
 
<일다>에 “박혜령의 숲에서 보낸 편지” 연재가 시작되었습니다. 경북 영덕 한 산골마을로 귀농하여 농사짓고 살아가는 박혜령씨가 ‘대자연 속 일부분의 눈’으로 세상을 향해 건네는 작은 이야기입니다. 개발과 성장, 물질과 성공을 쫓아 내달려가는 한국사회에 ‘보다 나은 길이 있다’며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편지”가 격주로 독자들을 찾아갑니다. [편집자 주] www.ildaro.com

*필자 소개: 박혜령(43). 산골서 살고자 9년 전 남편과 창수령 독경산 아래에 둥지를 튼 농부로, 규리(딸)와 솜솜이(고양이)라는 두 딸을 두었습니다. 농업이 아닌 농사를 통해 삶을 배우고 세상을 바라보며, 힘겨워하면서도 만족하는 삶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수리부엉이, 너구리, 수달, 민물가재, 노루, 매, 오소리, 토끼… 수많은 야생동물과 삶터를 공유하며 대화를 시도하는 것을 취미 삼고, 핵발전소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진경산수화 같은 산줄기에 보금자리를 마련하다
 
영덕의 해안에서 영양을 향해 꼬불꼬불한 국도를 따라 20여분을 넘게 달리다 보면, 왼쪽으로 마치 정선의 진경산수화를 보는 듯한 산줄기가 창수령을 향해 뻗어있다.
 
9년 전 ‘세상에서 가장 먼 곳을 가리라’ 생각하고 우리는 이 언저리를 달리며 있었다. 세상 끝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지, 마치 존재하지 않는 상상 속 세상을 그리듯 말이다.
 
주말을 이용해 피곤하게 다니면서도 지치거나 포기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없을 세상을 찾을 수 있을 지 모른다는 동화 같은 상상들- 사회가 정해놓은 구조와 관계의 불합리로부터의 분리, 권력으로부터의 해방, 피라미드처럼 엮여 있는 착취 구조로부터의 독립- 그렇다. 분명 그것은 동화 같은 상상이었으며, 사회가 주는 무력감을 극복하고 행복을 꿈꾸는 방법이었으리라.
 
그런 중에 창문을 열고 무아지경에 있던 내 눈에 바로 그 산줄기가 들어왔다. 가을 무렵 단풍이 한창인 산은, 순간 멈춘 시간 속으로 나를 데려가서 무한한 속삭임을 들려주는 듯 황홀했다.
 

▲ 9년 전 ‘세상에서 가장 먼 곳을 가리라’ 생각하고 영덕의 꼬불꼬불한 국도를 따라 달리다, 진경산수화를 보는 듯한 산줄기에 반해 이곳에 터를 잡았다.     © 박혜령 

그 산은 4계절이 아름답지 않은 날이 없다. 봄엔 산벚꽃과 밤꽃이 산중턱에 흐드러지고, 여름엔 짙은 녹음이 싱그럽고, 가을엔 갖가지 색의 단풍이 어우러져 화려한 빛깔의 여유를 부리며, 무엇보다 가장 절정은 겨울의 아니 늦겨울에 쏟아지는 눈폭탄에 온통 하얗게 계절의 마지막을 즐기는 산줄기의 벅찬 눈꽃이다. 이 곳은 늦겨울부터 3월초까지 여러 차례 함박눈이 폭탄처럼 쏟아진다.

 
지금도 나는 그 산세를 지나며 동화 같은 상상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것은 주문과도 같으며 그저 한낱 시골이 아닌, 나에게 주는 유일한 선물과 같은 세상으로의 진입로이다.
 
규리(딸아이 이름)와 나는 남편과 창수(내가 사는 면의 이름)의 진경산수화를 말하고 대화하며, 산과 친구한다. 그는 우리의 삶을 그대로 보고 듣고 느끼기 때문이다.
 
친환경에너지를 생산한다는 명분으로 행해진 ‘파괴’
 
이처럼 산 얘기에 몰두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어느 날부턴가 우리는 더 이상 그 산을 바라보지도 말하지도 않으며, 친구하기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리며 외면하기 시작했다. 산 정상에 커다란 상처가 나서, 더 이상 그 곳을 볼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산 정상부를 깊게 깎아 만든 10여 미터 폭의 도로가 능선을 따라 끝없이 이어지며, 그 곳에 풍력발전기가 죽 들어선 것이다.
 
▲ 어느 날부터 산 정상부를 깊게 깎아 도로를 내더니, 그 길이 능선을 따라 끝없이 이어지며 풍력발전기가 죽 들어섰다.     © 박혜령 

 
나는 알지 못한다. 이것이 정말 필요하고 정당한 일인지. 아니, ‘누군가의 필요’에 의한 행위가 모두 정당해지는 논리를 알지 못한다. 아마 누구도 그건 모르는 일이라 할 것이다.
 
대체에너지가 화석 연료의 환경 파괴를 줄이고, 핵발전소의 방사능으로부터도 안전한 대안임에는 분명하리라. 그러나 이것이 가만히 두어도 연간 1ha(3천 평)당 탄소 1.98톤을 흡수한다는 자연림을 무참히 벌거숭이로 만들고, 희귀 동식물들의 서식처를 빼앗으면서 얻는 가치라면, 너무 가혹하고 비정하지 않은가? 인간에 대한 착취는 불합리하지만, 자연에 대한 착취는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으려나? 또 그것이 진정 ‘지속 가능한 가치’일까?
 
산아래 살던 원주민들은 토사로 물이 오염돼 더 이상 산이 주는 물을 먹을 수 없게 되었다. 번쩍이는 야광등과 진동하는 쇠 냄새에, 동물들의 왕래도 어려워졌다. 통로가 가로막힌 동물들이 산아래 밭에 있는 채소들을 먹이로 삼게 되면서, 농민들은 매년 늘어나는 야생동물 피해를 호소하고 있다. 그 이유가 야생동물 개체 수가 늘어서인지, 산림파괴로 인한 피해가 늘어서인지에 대한 조사도 없이, 이 곳은 해마다 ‘수렵 허가 구역’으로 지정되고 있다.
 
내가 사는 곳에서 일어난 이 모든 일들이 막대한 에너지 소비에 대처하고 친환경에너지를 생산한다는 명분으로 행해졌다.
 
개발을 할 때 지역주민과 환경에 피해를 줄 것이 우려됨에 따라 법적으로 받게 되어 있는 ‘환경영향평가’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영덕의 풍력발전단지는 그도 무시된 채, 이왕 지은 것이니 사회 공공성에 비추어 편법을 허용하겠다 하였다.
 
원주민들은 여러 이의 제기를 하였고, 일부 의견은 반영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 발전소 주변 지역에 지원되는 지원금이 나누어 지는 시기를 즈음하여, 모든 이의제기는 덮였다. 그 지원금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였다.
 
더 광폭해질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전쟁을 우려하며
 
오늘 밤에도 풍력기를 광고하기 위한 사이키 조명이 산자락 위에서 현란하게 춤추고 있다. 저 불빛아래에서 뭍 생명들은 나처럼 낯설고 두렵지 않을까? 그저 고개 돌려 보지 않는 것처럼, 저 산 위 생명들도 돌려 눕는 것으로 더 이상의 피해는 없기를 바랄 뿐이다.
 
▲ 풍력발전기가 춤을 추는 산, 정상에 커다란 상처가 난 산을 더 이상 이전처럼 바라볼 수가 없다.     © 박혜령 

누군가의 위에서 군림하고 누군가의 아래에서 억압받지 않는, 유린되지 않는 세상은 아무리 깊은 산골짝이라도 찾아볼 수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앞으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전쟁은 더 광폭하게 행해질 것이다.

 
인간이 다른 것에 우선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라면 생긴 그대로 모두 존중 받는 그런 삶을 살 수 있기를 진정 소원한다. 그것이 사람일 수도, 나무일 수도, 바다일 수도, 닭이나 고양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처음 여기를 선택했던 한 가지 이유, 세상의 가장 먼 곳에서 찾고 싶었던 존중과 공존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이제 세상 밖으로 한 발 내딛는다. 

박혜령 / 미디어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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