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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신문 <일다> www.ildaro.com 는 2003년 5월 1일 창간한 대안언론입니다. <일다>는 "이루어지다, 되다"라는 의미의 우리 옛말이며 "없던 것이 생기다, 희미하던 것이 왕성해지다, 쓸 것과 못 쓸 것을 가려내다" 등의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다>는 여성과 소수자의 시선으로 사회를 비추는 매체로, 다양한 작가와 저널리스트들을 발굴해왔으며, 독자들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일다> 자야, 귀촌을 이야기하다: 넷째 이야기②

손가락을 통해 전해 오는 고양이의 숨은 얕고 가빴다. 겁이 더럭 났다. 뭐야, 이거. 어디 아픈 거 아냐? 그러고 보니 고양이의 엎드린 자세가 정상은 아닌 것 같았다. 다리 관절이 비틀리거나 꺾인 것처럼 어딘지 모르게 불편해 보였다고 할까.

 
나는 부엌에 들어가 몇 개의 다시멸치를 종지에 담고 따뜻한 물을 살짝 부은 후, 그것을 들고 나가 아궁이 앞에 놓았다. 어디가 좀 아프더라도 배가 고프면 스스로 기어 나와 멸치를 먹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나와 K가 아침상을 물리도록 고양이는 꼼짝하지 않았고, 그 사이 멸치는 퉁퉁 불어터진 채로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 속으로
 
우리는 스티로폼 박스에 신문지를 깔고는 고양이를 아궁이에서 꺼내 그리로 옮겼다. 그런데 K의 손이 그 가냘프고 여린 등을 잡아 올리는 순간, 고양이가 살짝 눈을 뜨며 '야옹' 하고 소리를 내는 게 아닌가. 실낱같은 그 소리는 그러나 이내 잠잠해졌고 노란 빛이 도는 눈동자도 다시는 볼 수 없었다.
 
나는 박스 안에 모로 뉘인 고양이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아궁이 안에 엎어져 있던 탓에 재가 묻어 지저분했으나, 까만 몸통과 대비될 만큼 얼굴이 하얗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새끼 특유의 그 앳되고 뽀얀 결이라니. 나는 왠지 기분이 묘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기 한 몸 움직일 수조차 없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오로지 여리고 약하게 숨을 쉬는 것뿐인 고양이를 보고 있자니, 슬픔인지 아픔인지 혹은 두려움인지 모를 수많은 감정과 상념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멀어지길 반복하는 듯도 했다.
 
이처럼 혼돈스러운 내 마음의 중심에는 오래 전 옛날, 우리 집에서 키우던 개 '진도'가 있음을 나는 모르지 않았다. 지난 번 글에서는 한 번도 반려동물이란 걸 기른 적이 없다더니 웬 개냐고? 우리 집에서 개를 키운 건 사실이고, 그 말이 거짓이 아닌 것도 맞다. 개를 키우던 5년여 동안 나는 한 번도 그에게 밥을 주거나 산책을 시키거나 심지어는 품에 안지조차 않았으니까. 다시 말해 나와 그 개는 서로를 평생의 반려자로 여기기는커녕, 그 짧은 기간에조차 함께한다는 친밀감을 전혀 나누지 못했던 것이다.
 
그 개는 새끼 때 우리 집에 왔다. 누가 주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분이 토종 진돗개라고 소개를 했기에, 그때부터 강아지의 이름은 진도가 되었다. 당시엔 나도 기껏해야 예닐곱 살이니 새끼였던 셈인데, 보통 어린아이와 달리 나는 강아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싫어한 것은 아니고 그저 관심이 없었다고 해두자.
 
실제로 나는 강아지 시절의 진도에 대해 기억하는 게 거의 없다. 처음 왔을 때 눈송이처럼 하얗고 폭신했던 것만 생생할 뿐. 그 이후로는 오직 장성할 대로 장성한 진도만 떠오르는데, 그 기억이라는 게 대개는 무섭고 어떤 건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을 만큼 섬뜩하기까지 하다.
 
우리 집의 불문율, 진도 이야기
 
빠른 시간 안에 어른이 된 진도는 골격이 크고 잘 생겼었다. 짖는 소리는 또 얼마나 우렁찬지 누가 봐도 멋지고 늠름한 진돗개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진도는 자라면서 점점 난폭해져 갔다. 낯선 이에게 거칠게 대들며 사납게 짖는 건 물론이고, 심지어 우리 식구들에게도 눈에 날카로운 각을 세우며 으르렁거리기가 예사였다.
 
돌아보면 우리 식구 중 누구도 진도를 진심으로 예뻐하고 챙겨준 이는 없던 것 같다. 진도는 우리 집에 온 그날부터 집 안이 아닌 바깥마당에서 키워졌는데, 끼니마다 엄마가 그릇에 밥과 물을 부어준 게 그가 받은 보살핌과 사랑의 전부라 할 수 있다. 어릴 때는 그래도 오빠가 가끔 산책을 시켰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진도가 성장한 이후로는 힘이 장사인데다 거칠기까지 해서, 식구 중 누구도 산책을 시키는 건 고사하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더군다나 진도는 제 힘과 기술을 이용하여 종종 목에 매인 줄을 스스로 풀곤 했다. 그런 날이면 나는 학교가려고 현관문을 열었다가도 다시 집 안으로 기어들었다. 집에서 키우는 개가 뭐가 무섭냐고 엄마가 아무리 잔소리를 하고 때론 등짝을 후려쳐도, 나는 엄마가 진도를 잡아 다시 목줄을 맬 때까지 소리를 지르며 울어댔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사람도 아닌 엄마가 진도에게 물리고 만다. 엄마 말로는 밥을 주는데 진도가 갑자기 뛰어올라 배를 물었다고 했다. 큰 상처는 나지 않았으나 엄마는 그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듯했다. 하지만 그건 그저 앞으로 벌어질 큰 사건들의 전조였을 뿐. 그 이후 진도는 더 자주 목줄을 풀고는 대문 밖으로 뛰어나갔고, 그때마다 우리 집은 동네 사람들의 거친 항의에 시달려야 했다.
 
급기야 진도가 동네 사람을 무는 바람에 치료비 보상은 물론이거니와 온갖 욕을 다 듣고도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던 사건을 마지막으로, 엄마는 진도를 팔기로 결심했다. 유일하게 진도에게 밥을 먹인 사람이자 진도가 사고를 칠 때마다 그를 다시 집으로 데려와 목줄을 맬 수 있던 엄마가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으니, 다른 식구의 의견은 듣고 말고 할 게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진도를 데리고 가기 위해 일명 개장수라 불리는 한 아저씨가 우리 집에 왔다. 당시 국민학교 3학년이던 나는 하필이면 왜 그날 그 시각에 집에 있었던 것인지. 이미 바깥은 진도가 울부짖으며 날뛰는 소리로 요란했고, 그 격렬한 울음과 몸짓에 공포와 원망과 분노가 가득하다는 것을 어린 마음에도 쉽게 알 수 있었다. 나는 겁이 나고 무서워 담요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그런데 그때 엄마가 들어오더니 절대 바깥에 나오지 말라며 신신당부를 하고는 다른 방으로 건너가는 게 아닌가. 엄마의 붉어진 눈과 어딘지 모르게 황망한 거동을 보며 나는 짐작했다. 진도가 살아서 이 집을 나가기는 글렀다는 것을. 엄마는 물론이고 전문 개장수인 그 아저씨조차도 살아 있는 진도의 목줄을 끌러 개장에 실을 수는 없다는 것을.

 
나는 다시 담요 속으로 기어들어가 베개에 얼굴을 묻고는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흘렀다. 새삼스럽게 진도가 불쌍해서만은 아니었다. 진도에게 철저히 무관심했던 나의 행적이 미안해서만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사랑받지 못하고 보호받지 못하는 것의 비극적인 결말을 목도한 것 같아 두려웠다고 할까.
 
당시의 어린 나는 어쩌면 충분한 사랑과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하는 것에 대한 결핍감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마지막 길을 가는 진도에게 내 마음을 투사하여 우울한 자기 연민의 동굴 속으로 빠져들었는지도. 분명한 것은 그 날 이후 진도에 관한 이야기는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서는 안 될 우리 집의 불문율이 되었다는 것, 그뿐이다. 

 
최초의 교감과 소통을 경험하다

▲ 종종 우리 집에 들러 마당을 한 바퀴 순회하고 표표히 사라지는 고양이의 뒷모습. 반려동물을 곁에 두고 함께 생활할 자신이 없다면 이렇게 관계 맺는 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다.     © 자야
 
진도가 우리 집에 오기 전부터 동물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진도 사건 이후 나는 어떤 종류의 동물이든 집에서 키우는 것에 대해 심각한 두려움과 공포를 품게 되었다. 금산과 남원에 살 때는 집 주인이 개를 한두 마리씩 키웠는데, 간혹 주인이 집을 비우면서 내게 개들을 부탁할 때면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불안해지곤 했다. 기껏해야 사료 주고 물을 먹이는 정도인데도 그 일이 내게는 큰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내가 과연 그들을 잘 돌볼 수 있을까? 뭘 잘못 먹어서 그들이 갑자기 죽으면 어떡하지? 밤에 누가 와서 그들을 데려간다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질문들이 머릿속을 떠다니는 바람에, 한밤중에도 몇 번이고 밖에 나가 개들의 안전을 확인할 정도였다. 그러니 어느 날 갑자기 고양이가, 그것도 작고 여린 데다 곧 죽을 것처럼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새끼 고양이가 나를 찾아왔을 때 얼마나 당황하고 놀랐을 것인가.
 
K가 출근한 후 나는 30분 간격으로 고양이의 상태를 살폈다. 나아지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느 시점엔가 나는 고양이가 오줌을 지려 박스 안에 물이 흥건한 것을 발견했고, 그 순간 고양이의 수명이 다했음을 예감했다. 아닌 게 아니라 고양이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얕고 가빴던 숨을 완전히 놓아버렸다.
 
더는 오르락내리락 하지 않는, 한없이 고요한 그의 가슴과 등을 보고 있자니, 진도가 집을 떠나던 날처럼 찔끔찔끔 눈물이 났다. 그러나 이번 눈물은 사랑받지 못하고 보호받지 못하는 것의 비극적인 결말에 대한 두려움 따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그저 사라져 가는 한 생명에 대한 안쓰러움과 애도의 표현이었다. 내 손으로 먹이 한 번 줘본 적이 없는 고양이지만, 그래도 그가 내게로 왔고 나 또한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그에게 관심과 애정을 쏟았다는 점에 스스로 위안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생애 최초로 동물과 교감을 하고 소통을 해본 느낌이랄까. 그래서 진도에 관한 어둡고 질척이는 기억으로부터 조금은 빠져나온 기분이랄까.
 
퇴근 후 집에 돌아온 K는 땔감을 실어 나르는 손수레에 고양이를 싣고 인근 대나무 숲으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고양이와 작별 인사를 했다. 좋은 데 가거라. 훗날 <워낭소리>라는 영화를 보니 주인공 할아버지도 당신과 몇 십 년을 함께하다 먼저 저 세상으로 간 늙은 소에게 똑같은 말씀을 하고 계셨다. 좋은 데 가래이.
 
죽어가는 소와 오버랩 되며 떠오르는 진도와 고양이에 관한 기억 때문에 영화를 보는 내내 나의 가슴은 먹먹했다. 하지만 그 감정은 더 이상 해묵은 죄책감과 두려움이 아닌 순수한 슬픔에 가까운 것이었고, 그때 나는 알았다. 소를 떠나보내는 할아버지의 눈 꼬리로 번져가던 그 깊고 따스한 눈물의 의미를 내가 온전히 이해할 순 없을지 몰라도, 최소한 삼십 년 간 나 자신을 가두어 온 두려움과 공포의 골짜기 하나는 비로소 넘어섰다는 것을. 이제는 나도 반려동물이라는 걸 길러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감히 할 수 있을 만큼. 딱 그 정도만 말이다.
 
아직은, 그러나 언젠가
 
그러면 이제 개든 고양이든 닭이든 직접 키울 수 있겠느냐고? 아니, 아직은 아니다. 고양이를 보내고 나서 몇 번인가 그런 제안을 받고 귀가 솔깃했었지만, 한편으론 영 자신 없어하는 나를 발견하곤 다음으로 미뤘다. 그러고 보면 뭔가를 생의 반려자로 삼는 일은 단지 그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만 극복했다고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특히 그 대상이 나보다 여리고 약하다면. 그래서 때때로 내가 보호막이 되어 주어야 한다면.
 
그래서 나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돌봄의 품성과 책임감이 더 키워질 때까지는 제 발로 내 집에 찾아오는 개나 고양이를 내치지 않고, 그렇다고 호들갑을 떨며 반기지도 않고, 다만 무심한 듯 다정한 시선을 보내는 정도로 만족하자고. 누가 알겠나. 그러다 어느 한 녀석을 만나 반려동물 대 반려인간으로 관계를 맺게 될지. 그때는 설혹 내가 여전히 준비가 덜 돼 있는 상태라 할지라도 관계가 나를 성숙시키리라 낙관한다. 쉽게 흔들리는 나의 마음과 의지보다는 아무래도 인연의 힘이 더 크고 강할 테니까. (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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