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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이경신의 도서관 나들이(51) 인류에게 과연 미래가 있을까?  
 
올여름은 유별났다. 햇빛이 필요한 시기에는 비가 주룩주룩 내리더니, 때 아닌 불볕더위가 덮쳤다. 광복절이 지나면 더위가 한풀 꺾인다는 그동안의 경험이 무색했다.
 
기후가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는 동안, 내 몸은 변덕스러운 일기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비명을 질러댔다. 8월말의 예기치 못한 더위로 나는 온몸에 시뻘건 두드러기가 돋는, 지금껏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심각한 열 알레르기에 시달려야 했다. 그나마 새벽, 한밤중의 기온이 떨어져서 알레르기의 고통을 떨쳐낼 수 있었지만, 아직도 한낮 더위가 기세등등해서 외출은 여전히 부담스럽다.
 

도서관도 문 닫기 직전, 한밤중에만 잠깐 들를 뿐, 될수록 집에 있는 책을 골라 읽는다. 아니, 날씨를 핑계로 책을 밀쳐뒀다. 앨런 와이즈먼이 쓴 <인간 없는 세상>(랜덤하우스, 2007)은 올여름 내가 읽은 몇 권 안 되는 책들 가운데 하나다. 제목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인간 없는 미래 세상’을 그려보려면 자연히, 인간이 존재하기 전의 아득한 과거, 인간이 탄생해 진화한 가까운 과거, 인간으로 들끓는 현 세계를 들여다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상상력이란 이미 존재한 것, 지금 존재하는 것에서 나오기 마련이니까.
 
생명의 모태인 바다
 
바다야말로 우리의 상상에 날개를 달아줄 것 같다. 지구가 태어나고 바다가 태어나고 지금보다 더 넓었던 바다에서 생명이 태어나고, 급기야 인간이 태어나는 것을 상상해보자.
 
더위를 피해 여름 바다를 다녀온 이들은 많겠지만,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우리 인간에게 바다는 아무래도 육지보다 낯설다. 하지만 모든 생물은 바다로부터 태어났으며, 인간을 포함한 육지의 생명체조차 스스로 느끼건 못 느끼건, 바다를 품고 살아간다지 않는가.
 
“생명이 바다에서 시작된 것처럼 우리 각자는 각자의 삶을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소형 바다 속에서 시작하며, 배(胚)가 발생하는 과정에서는 아가미로 숨을 쉬던 동물에서부터 육지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에 이르기까지 이전의 조상들이 겪어 온 모든 단계를 반복한다.”(레이첼 카슨, <우리를 둘러싼 바다>, ‘어둠에 싸인 시작’ 중에서)
 
이처럼 인간 개개인은 바다에서 탄생한 생명의 진화 과정을 되풀이하며 삶을 시작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피는 나트륨, 칼륨, 칼슘이 들어 있는 바닷물과 비슷하고, 우리의 뼈는 칼슘이 풍부했던 옛 바다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인간 자체가 바다의 역사를 기억하는 바다의 유산인 것이다.
 
레이첼 카슨이 말하듯이, 홀로 차분히 바다를 대면할 수 있다면, 우리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물의 세계’라는 것, ‘대륙은 모든 것을 둘러싸고 있는 바다 수면 위로 잠시 솟아 있는 땅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마음 속 깊이 깨달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해안을 오르락내리락하는 파도를 바라보면서, 밀물과 썰물이 내보였다 숨겼다 하는 갯벌을 오가면서, 우리는 바다와 땅의 경계라는 것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지구에 바다가 생겨난 이래, 바다는 끊임없이 땅을 침범하고 물러나기를 반복해왔다. 바다는 생명체만이 아니라 땅에도 그 흔적을 남겨놓았다. 해발 6천 미터의 히말라야 산맥의 석회암은 한 때는 그곳이 바다였음을 알려준다. 우리가 밟고 있는 육지가 언제든 바다로 바뀔 수 있다는 상상이 결코 지나친 것 같지 않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바다
 

▲ 레이첼 카슨의 책 <우리를 둘러싼 바다(양철북, 2003)>   

 
바다는 항상 변화하고 움직인다. 바다 표면에서도 지상에서처럼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어둡고 고요한 바다 저 깊은 곳도 끊임없이 바뀐다.
 
언젠가부터 인간은 바다의 변화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농약과 비료를 사용하는 관행농업, 가축의 대량사육, 도시화와 공업화가 쏟아내는 하수와 폐수는 이미 강, 근해를 오염시켜 조류와 물고기, 다른 바다생명체들에게 위협이 된 지 오래다. 또 양어장을 조성해 연어와 새우와 같은 바다생물을 갖가지 화학물질을 동원해 대량 사육함으로써 바다오염을 가속화시켰고, 바다를 휘젓고 다니며 물고기를 남획했기 때문에 물고기의 씨가 마를 지경이다. 게다가, 화석연료에 대한 인간의 탐욕과 집착이 낳은 유조선의 기름유출사고도 심각한 바다오염과 생명체의 대량멸종에 책임이 있다.

심해를 핵폐기물의 쓰레기장으로 삼는 것도 문제다. 활발히 움직이는 바다 속에 버려진 방사능 화학물질은 결국 어디로 갈 것인가?
 
“깊은 바다의 난류, 깊이와 방향이 각각 다른 바다 속 거대한 강들의 수평 이동, 깊은 해저 바닥에서 광물질을 함유한 채 솟아오르는 물, 반대로 아래로 하강하는 거대한 표층수의 흐름, 이 모든 것은 거대한 혼합과정이 되어 시간이 지나면 방사성 오염물질은 골고루 확산되고 말 것이다.”(레이첼 카슨, 같은 책, ‘서문’ 중에서)
 
당장 방사능 물질은 무기물을 흡수해 살아가는 바다의 식물과 동물의 몸에 농축되고, 한 장소에 머물지 않는 이들과 함께 바다 속 여기저기로 옮겨 갈 것이다. 그리고 이들을 먹고 사는 몸집이 더 큰 동물들은 더 먼 바다로 헤엄쳐 다니면서 방사능을 확산시킬 것이다. 결국 인간이 깊은 바다에 내버려 감추고 싶어 했던 방사능은 인간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플라스틱이 넘치는 바다
 
인간은 지치지 않고 바다를 더럽힌다. 지금 바다의 표면은 플라스틱 천지다. 놀랍게도 해양쓰레기의 90%가 플라스틱이라고 한다.
 
20세기 중반부터 인간은 인조 플라스틱 제품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육지의 쓰레기 매립장에 플라스틱 쓰레기가 그다지 많지 않은 까닭은 플라스틱이 바다로 떠내려가기 때문이란다. 비, 바람, 강물을 따라 땅을 떠난 플라스틱이 해류를 따라 바다를 떠돌다 환류로 밀려들어와 소용돌이치는 광경을 상상해 보자.

▲ 노란색 점들로 표시된 곳이 '태평양 거대 쓰레기 지대(Great Pacific Garbage Patch)'. 하와이 주변에 형성된 두개의 거대한 쓰레기 섬으로 하와이 북단의 덩어리 하나만 한반도의 6배에 달한다. © 그린피스 
 
‘태평양 대 쓰레기장’이라는 별명이 붙은 ‘북태평양 아열대 환류’의 경우, 배를 타고 일주일동안 ‘컵, 병뚜껑, 엉킨 고기잡이 그물과 낚싯줄, 폴리스티렌 포장조각, 여섯 개들이 맥주 팩 고리, 터진 풍선, 샌드위치 랩 조각, 비닐봉지 등’과 같은 산업쓰레기를 헤쳐 나가야 빠져나올 수 있을 정도라고 하는데, 그 크기는 놀랍게도 아프리카 대륙에 맞먹는다고 한다. 이렇게 거대한 바다 쓰레기장이 된 열대환류가 여섯 개나 더 있다고 하니 끔찍하다. 그런데 이 바다 쓰레기의 80%가 육지에서 흘러들어온 것이라니!
 
문제는 자외선이 질기고 긴 사슬을 끊어주지 않는 한 플라스틱이 쉽게 분해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바다 속의 플라스틱은 낮은 수온으로 인해 육지의 플라스틱보다 분해되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추측한다. 하지만 현재까지는 플라스틱이 자연 분해된 사례가 없기에 그것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수십, 수백만 년 후가 지나면, 혹시 플라스틱을 분해할 수 있는 미생물이 진화하지 않을까?’하고 감히 상상해 볼 따름이다.
 
플라스틱의 미래가 불투명한 데도, 플라스틱의 사용범위는 날로 넓어지는 추세다. 심지어 샤워용 물비누, 마사지크림, 피부 각질 제거제, 세안제 등과 같은 미용제품에도 흔히 플라스틱이 사용된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 제품을 사용하면, 당연히 플라스틱 알갱이들은 하수관을 통해 강으로, 바다로 떠내려갈 것이다. 그리고 바다 생물이 그 알갱이를 삼킬 수도 있을 것이다. 플라스틱 조각을 먹고 비참한 최후를 맞은 새 이야기는 심심찮게 들었다. 하지만, 만약 동물성 플랑크톤이 미세한 플라스틱 가루를 먹어치운다면 어떨까?
 
바로 그때 선물 받은 피부각질 제거제가 떠올랐다. 확인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플라스틱 제품이었다. 난 통째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조금이라도 사용한다면 바로 바다로 유입될 테니까, 이 처치 곤란한 애물단지를 육지의 쓰레기장으로 내보내는 것이 그나마 낫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플라스틱을 이용한 싸구려 미용, 목욕제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매장이 계속 떠올라 현기증이 났다. 앞으로 플라스틱 바다의 운명이 어디를 향할지 참으로 궁금하다.

인간 ‘있는’ 미래 세상은 불가능한가?
 

▲ 태평양 거대 쓰레기 지대(Great Pacific Garbage Patch). ©그린피스 

 
사실 바다가 있어 생명체들이 지구상에서 살아가기에 적당한 온도가 유지된다고 한다. 햇빛은 지구를 골고루 데우지 못한다. 열을 잘 흡수하고 방출할 수 있는 물로 이루어진 바다가 나서서 햇빛 에너지를 공평하게 나눠주는 것이다. 마치 어머니가 자기 아이들을 배려하듯 바다도 생명을 챙기는 것 같다.
 
인류가 지금껏 배출해 온 이산화탄소를 절반 가까이 품어준 것도 바다다. 그러나 인간이 대기 중으로 발생시키는 이산화탄소가 날로 증가하는 만큼 바다도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번 세기가 끝날 무렵, 바다의 이산화탄소 흡수력이 10% 줄어들 것이라고 예측한다. 인간은 빙하가 녹아내리고, 해수면이 상승하는 현실을 부채질하며, 바다의 기온조절 능력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어쩌면 ‘인간이 사라지면’ 지구와 다른 생명체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구는 시간이 지나면서 인간이 만든 상처로부터 서서히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사라지기에 앞서, 빙하가 녹아 해류의 흐름에 영향을 미치거나 깊이 잠들어 있는 해저메탄을 깨워 인간뿐만 아니라 지구 생명체 대부분을 소멸시키는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초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 없는 세상’에 대한 상상을 자극했던 바로 그 현실은 ‘생명 없는 세상’을 향해 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연계의 균형을 깨뜨리는 인간, 다른 생명체들을 멸종시키고, 지구환경을 급속히 변모, 파괴시키는 어리석은 인간에게도 여전히 생존의 기회가 있을까? 생명의 근원이자 생명을 지켜온 바다까지도 침범하고 오염시키는, 오만한 인간에게도 여전히 미래가 있을까?
 
쉽게 답을 얻을 수 없는 질문들 때문인지, 9월 중순에 어울리지 않는 한낮의 열기 때문인지 기운이 쭉 빠진다. 다시 열 알레르기가 하나 둘 고개를 든다. 아, 바다가 그립다. (이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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