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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반짝임을 지키기 위해
추은혜의 페미니즘 책장(3) 버지니아 울프「자기만의 방」 
 
[페미니스트로 살아가는 20대 여성이 일상에서 부딪히는 고민과 그 해답을 찾아가는 페미니즘 책 여행이 시작됩니다. 폭력의 시대에 평등과 자유의 꿈을 꾸는 여성들의 생각과 삶을 소개하고, 이를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자 합니다.―편집자 주]
 
내가 처음으로 ‘내가 번 돈’이란 것을 손에 쥐었을 때는 스무 살이었다. 그리 많은 돈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부모님께 손 내밀지 않고도, 친구들을 만나고 사고 싶은 것들을 사는 소소한 비용을 스스로 감당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뻤다. 과외, 학원 강사, 캠프카운슬러, 카페 점원 등등 여러 아르바이트를 통해 얻는 경험도 많았다.
 
하지만 늘 좋았던 것만은 아니었다. 한 달 내내 낮이고 밤이고 수업했는데도 오히려 월급을 받지 못할까 마음을 졸여야 했던 때도 있었고,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불합리한 조건을 강요받으면서도 그저 받아들여야만 했던 때도 있었다. 인정할 수 없는 권위, ‘너나 잘하세요’라고 쏘아붙여줄 용기도 없어서 속만 끓여야 했던, 그러던 언젠가의 날들 중에 문득 들었던 생각. 아무런 의미가 없는 시간들-나에게 목적으로서의 의미도, 과정으로서의 의미도 그 어느 하나 없는-그저 몇 푼의 돈을 위해 날아가 버리는 시간들. 그 속에서 내가 보잘 것 없게 느껴지고, 결국엔 모든 게 피곤해지곤 했다.
 
“그 전까지 나는 신문사들에 잡다한 일거리를 구걸하고 여기에다 원숭이쇼를 기고하고 저기에다 결혼식을 취재함으로써 생계를 이어나갔지요. (중략) 그러나 지금까지도 그러한 것보다 더한 고통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그 당시 내 마음 속에서 싹튼 두려움과 쓰라림의 녹이었습니다. 우선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항상 하고 있다는 사실, (중략) 그리고 그것을 묻어 버리면 죽는 것이나 다름없는 하나의 재능-작은 것이지만 소유자에게는 소중한-이 소멸하고 있으며 그와 함께 나 자신, 나의 영혼도 소멸하고 있다는 생각, 이 모든 것들이 나무의 생명을 고갈시키며 봄날의 개화를 잠식하는 녹과 같았습니다.” (자기만의 방, 58-59쪽)
 
만약 여성들이 자기소유의 재산을 가졌다면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민음사, 2006)>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은 1929년에 출간된 것으로, 케임브리지 대학 뉴넘 칼리지에서의 강연을 토대로 한 에세이이다.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그 시대 여성들이 왜 작가(독창성과 주체성을 발휘할 수 있는; 일종의 상징성을 담지한)가 되기 어려운지에 대해 사회적, 역사적인 측면에서 조목조목 따져가며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는 ‘만약 ~ 한다면’과 같은 흥미로운 몇 가지 가정들이 등장하는데, 가령 ‘만약 셰익스피어 시대에 어떤 여성이 셰익스피어의 재능을 가진다면’(책에서는 셰익스피어에게 그와 똑같은 재능을 가진 여동생을 가정한다), ‘만약 우리가 모두 일 년에 500파운드를 벌고 자기 방을 갖는다면’ 등이다.

평균 열 세 명의 아이를 낳고 평생토록 가사 일을 전담해야 했던 당대 여성들은 그녀들의 어머니도, 어머니의 어머니도 언제나 가난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운명에 놓여있었다는 것이 그녀의 설명이다. 만약 그녀들이 가난하지 않았다면, 탐험을 하거나 글을 쓸 수 있는, 사색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공간과 모든 조건들이 구비되었더라면 그녀들 개인의 생은 물론이고 인류의 문화나 역사도 훨씬 풍성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가난함으로써, 자기 소유의 재산을 가지지 못함으로써 그녀들이 잃었던 것은 비단 작가적 재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독창성과 주체성뿐만이 아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만의 생을 꾸려나갈 수 없는 현실에서 기인하는 무력감, 자신감의 상실, 타인(주로 남성)이 그들에게 부과한 수많은 편견, 왜곡된 인식의 불가피한 수용, 사회적 차별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고 스스로를 열등한 존재로 여기고 살아갔던 세월들이 있다.
 
“어느 성(性)에게나 삶은 힘들고 어려운 영속적 투쟁입니다. 그것은 커다란 용기와 힘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우리와 같이 환상을 지닌 피조물에겐 그것은 아마 다른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필요로 할 겁니다. 자신감이 없으면 우리는 요람에 누운 아기와 마찬가지지요. 이 측정할 수 없이 가벼운, 그러나 무한한 가치가 있는 자질을 어떻게 해야 가장 신속하게 획득할 수 있을까요? 다른 사람들이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함으로써 가능하겠지요. (중략) 그러므로 통치해야 하고 정복해야 하는 가장이 다수의 사람들, 실제로 인류의 절반이 자기보다 열등하다고 느끼는 것은 막대한 중요성을 갖는 겁니다. 그것이 실상 그의 권력의 중요한 원천 중 하나일 겁니다.” (자기만의 방, 54-55쪽)
 
‘자기만의 방’으로부터 백년이 흘렀지만
 
버지니아 울프에 따르면, 여성들은 수세기 동안 ‘남성의 모습을 실제의 두 배로 확대반사 하는 거울’ 노릇을 해 왔다고 한다. 영국에서 결혼한 여성들이 재산권을 갖게 된 것은 1882년부터이지만 그녀가 활동하던 시기(20세기 초반)에도 수많은 여성들은 여전히 가난했고,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도처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지금으로부터 백 년 뒤’를 가정한다.
 
“더욱이 앞으로 백년이 지나면 여성은 보호받는 성이기를 그만둘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그들은 한때 자신들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모든 행위와 능력 발휘에 참여할 것입니다. (중략) 여성이 보호받는 성이었을 때 관찰된 사실에 근거를 둔 모든 가정들은 사라질 것입니다.” (자기만의 방, 62쪽)
 
언젠가 한 미국인 교수님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 분은 ‘골드미스’라는 단어에 매우 흥미를 보이셨다.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들처럼 화려하고 당당하고, 소득수준이 웬만한 남자들보다 월등히 높으며 소위 ‘성공한’ 사회적 지위와 명성을 가진 여성들. 물론 미국에도 그런 여성들이 많지만, 그들을 우리나라처럼 따로 ‘골드미스’라는 카테고리로 분류해서 명명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골드미스의 등장은 버지니아 울프가 예견한 백 년 뒤의 여성의 모습일까. 아니면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채 산재해 있는 수많은 여성의 문제를 가리는 도구에 불과할 뿐일까.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에도 우리는 여성의 가난에 대해서, 사회에서 남성과 비교했을 때 결코 동등하지 못한 처우, 지위 등에 대해서 여전히 고민해야만 한다. 그것은 우리 사회 내에 실제로 그러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여성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버지니아 울프가 가정한 약 백 년 뒤의 지금도 그 때의 문제 상황들이 많은 부분 유효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우리 삶의 실질적 기반인 물질적 토대에 대해서 부정하지 않는다. 여성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활동범위를 확대시키기 위해서 일정 정도의 돈과 자기만의 방은 일종의 필요조건이라고 말하고 있다.
 
“바로 그것입니다. 지적 자유는 물질적인 것들에 달려 있습니다. 시는 지적자유에 의존하지요. 그리고 여성들은 단지 이백년 동안이 아니라 역사가 시작된 이래 항상 가난했습니다. 여성에게는 아테네의 노예의 아들보다도 지적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여성들은 시를 쓸 수 있는 일말의 기회도 없었던 거지요. 이러한 이유로 해서 나는 돈과 자기만의 방을 그토록 강조한 것입니다” (자기만의 방 168쪽)
 
지적 자유가 물질적인 것들에 달려 있다는 그녀의 주장은 일면 위로가 되면서도 한편 불안한 마음 또한 드는 것이 사실이다. 돈을 번다는 것, 때로는 그 자체만으로 무척 고단한 과정임을 일부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 스스로가 즐거울 수 있는 일을 함으로써 돈을 벌 수 있다면 가장 좋은 경우이겠으나 그것이 얼마만큼의 실현 가능성을 지닐지는 불투명하다.
 
어쩌면 요즘 사회에서 그려지는 이십대들의 서글픈 초상-스펙경쟁, 각종 자격증, 시험들에 전전긍긍하는-의 이면에는 그 최소한의 ‘필요조건’을 충족시킨 삶을 살기 위해서는 아닐까 하고. 나와 내 친구들의 오늘을 위로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힘내자고. 그러니까 우리, 여전히 꿈꾸고 살자고. 우리 안의 반짝반짝한 것들이 빛을 잃지 않게.  (추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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