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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자야, 귀촌을 이야기하다: 셋째 이야기③ 몸과의 소통
 
[글쓴이 자야. 프리랜서로 글을 쓰거나 책을 만든 지 15년. 함부로 대해 온 몸, 마음, 영혼에 속죄하는 심정으로 요가와 명상을 시작한 지 10년. 명함에 글 쓰고 요가 하는 자야, 라고 써넣 은 지 6년. 도시를 떠나 시골을 떠돌기 시작한 2년 만에 맞춤한 집을 만나 발 딛고 산 지 또한 2년... 그렇게 쌓이고 다져진 오래된 삶 위로, 계속해서 뿌리 내리고 싹을 틔우고 가지를 뻗는 ‘지금 여기’의 삶을 나누고자 합니다]

새벽에 눈을 뜬다. 빗방울들의 연주가 한창이다. 지붕을 나지막이 두드리는 소리, 이미 물로 흥건한 시멘트 바닥에 퉁기는 소리, 처마에 달린 물받이를 통해 수도 가에 엎어놓은 플라스틱 함지박 위로 낙하하는 소리. 그리고 마당 안과 대문 밖 텃밭의 진하고 깊은 적갈색 품속으로 사악사악 스미는 소리…. 각기 다른 그 소리들에 취한 나는, 일어나 요가 매트 위에 앉는 대신 조금 더 누워 있기로 한다.
 
고백하자면, 눈을 막 떴을 때만 해도 며칠 동안 계속해서 비가 내린다는 생각에 약간 짜증이 날 뻔했다. 다용도실 구석에서 꿉꿉한 냄새를 풍기며 쌓여가는 빨랫감과 눅진눅진해진 이부자리가 떠오른 데 이어, ‘오늘도 무씨를 심기는 다 글렀군. 더 늦으면 안 되는데.’ 하는 걱정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내가 있는 자리로 돌아오니 보이기 시작한다. 지금 이 시각에 내가 할 일은 빨래를 하고 무씨를 뿌리는 게 아니라는 것을. 빗소리를 듣는 것, 오직 그것만이 지금 내가 유일하게 경험할 수 있고 즐길 일이라는 것을.
 
소통의 전제, 처음 보듯 보기
 
‘오늘도 또 비가 내리는구나’ 라고 생각하는 이에게, 오늘 내리는 비는 어제 내린 비와 다르지 않다. ‘이젠 빗소리 듣기도 지겹다’고 말하는 이에게, 지금 들리는 빗소리는 며칠 내내 줄기차게 들어온 바로 그 빗소리와 같을 것이다. 말하자면 과거의 연장으로 현재를 경험하는 셈이다. 하지만 오늘의 비가 어제의 비와 같을 수 없고 지금 듣는 빗소리가 방금 전에 들은 빗소리와 같을 수는 없으니, 과거의 연장으로 현재를 경험한다는 건 결국 현재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와 관련해 오쇼 라즈니쉬(Osho Rajneesh)라는 선각자는 말했다. 어떤 대상을 보기 위해서는 그것과 나 사이에 아무것도, 이를테면 그것에 대해 내가 본 것, 들은 것, 읽은 것, 기억하고 있는 것, 경험한 것 등이 끼어들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그래야 비로소 그 대상과 함께 현존할 수 있고 그럴 때에만 진정 그것을 볼 수 있다고.
 
영적인 수련에서 이 주제는 곧잘 다루어진다. 어떤 곳에서는 이를 ‘처음 보듯이 보기’라 하고, 또 다른 곳에서는 ‘아이가 되어 보기’라고도 한다. 여기서 처음 본다는 것, 아이가 되어 본다는 것은 같은 의미다. 어떤 대상에 대한 정보와 개념과 지식과 경험을 모두 내려놓은 상태에서 그 대상 자체를 본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장미꽃을 예로 들어 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미꽃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자동적으로 자기 머릿속에 들어 있는 장미꽃에 관한 모든 정보와 이미지 등을 떠올리게 된다. 뜰에 핀 장미꽃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장미꽃의 색깔과 모양과 향기, 나아가 그와 연관된 추억을 이입시켜 보고, 그에 따라 장미꽃이 좋다든가 혹은 싫다든가, 아니면 좋지도 싫지도 않다든가 하는 식의 반응을 결정한다.
 
반면 그 모든 것이 비어 있는 순수의식으로, 마치 어린아이가 난생 처음 장미꽃을 마주하듯 본다면 어떨까. 붉은 꽃잎과 진한 향기, 날카로운 가시와 첫사랑의 기억 따위에 채색되지 않은, 다만 장미꽃이라 불리는 그것 자체의 본질을 좋고 싫다는 판단 없이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몸과 소통하는 비결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본다. 몸에 덧씌워진 온갖 정보와 관념과 기준과 시선들-뚱뚱하다 날씬하다, 피부색이 검다 하얗다, 살이 울퉁불퉁하다 매끄럽다, 살결이 곱다 거칠다, 키가 작다 크다, 비율이 좋다 아니다, S라인이다 D라인이다 따위-로부터 벗어나 생애 처음이듯 몸 자체를 볼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자기 몸과 만나 소통하고 사랑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때 내가 경험하는 몸은 날씬하고 뚱뚱한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예쁘거나 못난 몸도, 약하거나 강한 몸도 따로 없다. 그런 수식어들은 그야말로 몸을 꾸미는 말에 불과할 뿐이지 몸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몸 자체보다는 몸을 꾸미는 말들, 그 속에 들어 있는 수많은 편견과 이데올로기들을 먼저 만나지 않는가. 그리하여 왜 내 몸은 더 근사하고 멋지지 않느냐고 투덜대지 않는가. 마치 내가 내 몸을 늘 어딘가 아픈 애물단지로 규정하고는 끊임없이 몸과 싸워왔듯 말이다.
 
물론 몸의 불균형은 바로 잡고 건강을 해치는 식습관은 고쳐야 한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살을 빼거나 찌워야 할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시도가 억압이 아닌 치유의 방편이 되려면, 몸 자체를 만나 소통하고 사랑하는 것이 먼저다. 그것이 선행되지 않는 한 몸에 대한 이런저런 개입은 억압과 폭력이 되기 일쑤고, 그것은 또한 고스란히 독이 되어 몸에 쌓일 수밖에 없다.
 
느낄수록 깨어나고, 깨어날수록 더 잘 느끼는
 

▲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은 처음이다. 몸에 대한 기존의 관념과 기준과 시선들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비로소 처음인 몸을 만나 사랑할 수 있다.  © 자야

 
작년 가을부터 올 여름까지 한 예술대학에서 요가를 지도할 기회가 생겨 일주일에 두 시간씩 수업을 진행했다. 예술대학인데다가 수강생의 대부분이 무용과 전공자여서 그랬는가는 몰라도, 내가 수업시간에 만나는 학생들은 남들의 부러움을 살 만한 비쥬얼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있지도 않은 뱃살과 허벅지 두께로 고민을 했고, 심지어 살을 빼기 위해 습관적으로 굶기도 했다. 더군다나 내가 볼 때 그들은 몸을 쓰는 예술을 하고 있음에도 그다지 몸과 친하지도, 또 몸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나는 학생들에게 몸을 성찰하고 사랑하는 법을 안내해야 할 필요를 느꼈고, 그 방편의 하나로 몸과 섬세하게 접촉하는, 일명 ‘바디스캔’(bodyscan)이라 불리는 수련을 종종 하게 했다. 방법은 아래와 같다.
 
먼저 몸이 차갑지 않도록 요가매트나 얇은 담요를 깔고 그 위에 등을 대고 눕는다. 다리는 편하게 벌리고 양팔은 손바닥이 위로 향하게 하여 몸에서 약간 떨어지게 놓는다. 그리고 눈을 감는다. 자연스럽게 호흡을 하며 몸의 어느 부분이 불편하진 않은지, 긴장되어 있지는 않은지 살펴본다. 점차 몸이 이완되는 게 느껴지면 복부에 의식을 집중하고 숨을 쉴 때마다 배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바라본다. 깊은 호흡을 하려고 애쓸 필요 없이 그저 숨이 나를 통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면 된다.
 
그 다음엔 몸의 각 부분에 의식을 집중하면서 거기에서 일어나는 모든 감각을 느껴보는 작업을 진행한다. 우선 오른쪽 발가락에 의식을 집중하고 천천히 호흡을 한다. 그러면 거기에서 어떤 감각들이 느껴지기 시작하는데, 이때 중요한 것은 그 감각이 따뜻하든 서늘하든, 간지럽든 따갑든, 응축되든 풀리든 상관없이, 그에 대해 좋고 싫다는 판단 없이 그저 일어나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만약 아무것도 느낄 수 없으면 아무것도 느낄 수 없음을 받아들이도록 한다. 그 상태에서 충분히 머문 후에는 또한 호흡이 발가락 끝에서 일어난다고 상상하면서 그때 느껴지는 감각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오른쪽 발가락이 끝나면 다른 부위로 의식을 옮겨 가면서 같은 방식으로 감각을 느끼고 받아들이는 작업을 진행한다. {오른쪽 발(발가락 끝->발바닥->발등->오른발 전체), 오른쪽 다리(정강이->허벅지->오른다리 전체), 왼쪽 발과 다리(오른쪽과 같은 순서로), 골반, 복부, 가슴, 등, 오른쪽 손(손끝->손바닥->손등->오른손 전체), 오른쪽 팔(아래팔->위팔->오른팔 전체), 왼쪽 손과 팔(오른쪽과 같은 순서로), 어깨, 목, 머리(얼굴의 각 부위->뒷머리->정수리->머리 전체)}
 
마지막으로는 몸 전체를 통째로 의식하며 느껴보도록 한다. 이때는 몸은 완전히 이완되고 감각과 의식은 명료하게 깨어 있는 상태이므로, 굳이 몸 전체로 호흡을 한다고 상상하지 않아도 실제로 몸 구석구석이 열리고 닫히면서 숨이 들고 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특정 부위에 집중할 때보다 더욱 감각이 미묘해지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때도 역시 그 감각들을 일어나는 그대로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꾸준히 수련하면 평소 의식하지 못했던 몸의 감각이 예민하게 열리고 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또한 몸에서 일어나는 감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특정 감각에 대한 집착과 혐오 없이 초연해지는 법도 배우게 된다. 말하자면 몸을 그 자체로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인데, 이처럼 이해 받고 사랑 받을수록 몸은 또한 더 잘 깨어나고 더 많이 느끼면서 스스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몸을 통하지 않는 삶이 있을까 
 
‘처음 보듯 보기’와 ‘바디스캔’은 내가 요가 명상과 함께 꾸준히 실천하는 수련 테마이다. 그런데 시골에 살면서 느끼는 건, 꼭 따로 수련 시간을 마련하지 않아도 수련을 통해 만나는 특별한 경험들이 일상 속에서 저절로 일어날 때가 많다는 점이다.
 
오늘 새벽처럼 천 가지 만 가지로 울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눈을 뜰 때, 텃밭의 흙을 맨손으로 만지고 토닥일 때, 집 앞의 한 그루 감나무가 일 년 열 두 달을 어떻게 살며 나이테를 넓혀 가는지 확인할 때, 살점 하나 없이 바싹 마른 나무들을 거두어 손수레에 담아 집으로 끌고 올 때, 그리고 하늘과 땅을 가르며 무섭게 내리 꽂히는 천둥 번개에 내 몸의 세포들이 일제히 진저리치며 뼛속까지 저릿한 아픔이 퍼져나갈 때….
 
격렬하든 고요하든 거칠든 부드럽든 내 몸을 통해 오는 그 모든 자극을 저항 없이 느끼고 받아들이는 순간에, 나는 내가 몸과 함께 현존하고 있음을 본다. 그때 몸은 몸 이상의 무엇이 되어 마음의 소리를 전하고 영혼의 노래를 들려주기도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세계적인 요가 스승인 아헹가는 말했던 것일까. 내가 곧 몸은 아니지만 내가 몸이 아닌 것도 아니라고. 몸을 통하지 않고서는 신성을 볼 수 없다는 것, 그것만이 진실이라고.
 
신성(神性)까지는 모르겠지만 몸을 통하지 않고서, 몸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그 이상의 무엇과 진정으로 접촉하기란 힘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날마다 몸에서 시작하고 몸으로 끝낸다. 앉고 서고 눕고 걷는 것으로. 숨 쉬고 먹고 일하고 잠드는 것으로. 그러고 보면 이것 외에 삶이 또 뭘까, 싶기도 하다. 몸을 통하지 않는 삶, 혹시 그런 게 있다면 몰라도. (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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