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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이경신의 도서관 나들이(50) 삶을 채우는 휴식

분주한 금요일을 뒤로 하고 한가로운 토요일을 맞았다. 서둘러 처리해야 할 일도 없고, 약속이 없어 사람 만날 일도 없고,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근심거리도 없다. 오직 시간만 넉넉하다. 이 시간은 그냥 느긋하게 흘려가도록 내버려두면 된다. 느릿느릿 하루를 맞이하고 보낼 수 있어 정말 좋다. 조금 빈둥거리다 도서관에 다녀오기로 했다.
 
비 오는 주말, 휴식의 책을 찾아

▲ 웨인 멀러의 책 <휴(休)>(도솔, 2002)  
 
난 금요일이 휴관일이라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린다. 어제는 그 바쁜 와중에도 책을 살펴보러 도서관에 들렀었다. 역시나 허탕이었다. 오히려 잘 되었다. 오늘은 여유롭게 서가를 누비며 찬찬히 책들을 눈여겨 볼 수 있을 테니까. ‘휴식’에 관한 사색이 풍성한 책을 찾아볼 생각이다.
 
‘쉼’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서 집을 나서는 데,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마치 내가 나오길 기다렸다 장난치듯 물세례를 퍼붓는 것 같다. 한적한 길 위를 가득 메운, 물웅덩이들이 또 다른 장난을 걸어온다. 신발을 물 범벅으로 만들지 않으려면 요리조리 재치 있게 잘 피해야 한다. 그래도 한 번쯤은 웅덩이를 살짝 밟아줘야 장난질이 머쓱하지 않다. 비는 크고 작은 물웅덩이를 하나도 건너뛰지 않고 동그라미를 그리고, 또 그려 넣는다. 비는 지친 기색이 없다. 비랑 놀다 보니, 머릿속을 꽉 채웠던 생각들이 온데 간데 사라졌다.
 
어느덧 친숙한 도서관이다. 오늘은 지난 번 웬델 베리의 책을 여러 권 발견한 바로 그 서가를 탐색할 생각이다. 내가 지금 읽고 싶은 책을 그곳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한 확신이 들어서다. 마침 적당한 책이 내 눈 앞에 나타났다. 웨인 멀러의 <휴(休)(도솔, 2002)>다. 이 책은 쉬듯이 느릿느릿 읽어나가야 하리라.
 
책을 챙겨 도서관 문을 나서는 데 비는 벌써 멎어 있었다. 비 때문에 중단된, ‘휴식’에 대한 생각이 하나 둘 다시 떠오른다.
 
놀이와 휴식이 만나는 순간
 
특별히 애쓰지 않아도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놀이도 되지만 휴식도 된다.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가 적게 드니까, 당연히 덜 피로할 것이다. 놀이가 휴식이 되는 순간이다. 흥미롭고 읽기 편안한 책을 읽을 때, 귀를 자극하지 않는, 잔잔한 음악을 들을 때, 마음이 따뜻해지는 영화를 볼 때, 난 놀이와 휴식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을 느낀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고 수다를 떨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를 때, 연인과 사랑을 나누거나 벗을 떠올리면 편지를 쓰는 동안, 아이들과 어울려 놀 때,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연주하는 시간에도 놀면서 쉬는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꼭 해야 하는 일로부터 시선을 돌리고, 일상적인 삶의 속도에 제동을 거는 순간, 우리는 한숨 돌릴 수 있다. 그래서 노는 일도 충분히 휴식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놀이는 분명 휴식과 차이가 난다. 놀이는 때때로 삶의 에너지를 고갈시켜, 우리를 지치고 피로하게 만들기도 한다.
 
비우면 채워진다
 
“모든 삶의 핵심에는 이 비어 있음이 자리하고 있다. 이 비어 있음은 신의 입김이 들어와 삶이라는 음악을 만들어내는 피리, 속이 텅 빈 침묵의 피리와 같다. 그러므로 이 비어 있음이 없다면, 우리의 피리는 막혀버리고, 음악도 사랑도 자비도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다. 모든 창조는 이 비어 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웨인 멀러 <휴> ‘휴식의 두려움’)
 
‘속이 비어 있는 피리’라! 참으로 아름다운 비유가 아닌가. 도시의 분주한 삶은 우리를 필요 이상의 노동으로, 요란스러운 여가활동으로 내몬다. 노동도, 여가도 우리의 몸과 마음을 팽팽히 조여 온다. 채우는 데만 급급하다 보니, 비울 줄을 모른다. 그러다 보니 내내 긴장해서 칼날만 곧추 세운다. 느슨하게 풀어줄 수도 있어야 한다.
 
차를 마시며 향과 맛, 소리를 음미하고, 일기를 쓰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따뜻한 물속에 몸을 담그는 것도 좋다. 근처 공원이나 하천가를 어슬렁거리거나 야트막한 산길을 천천히 오르내리거나 길거리를 무작정 배회할 수도 있다. 잠에서 깨어나 잠시 숨을 고를 수도 있고, 잠들기 전에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도 있을 것이다. 몸과 마음을 풀어주면 일상이 고갈시킨 에너지가 서서히 다시 차오른다.
 
몸도 마음도 피로했던 유학시절, 묘지를 들르곤 했던 기억이 난다. 신기하게도 그곳 묘지는 우리나라와 달리, 마을이나 도시 안에 있어 쉽게 방문할 수 있었다. 인적 드문 묘지는 소란스러운 도시와는 동떨어진 섬처럼 고요했다. 난 묘지 한 귀퉁이에 놓인 벤치에 멍하니 앉아 있기도 하고, 크고 작은 무덤들 사이를 두리번거리며 거닐기도 했다. 어수선한 생각들이 사라지고 마음이 차분해질 즈음,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갈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당시 내게 도시의 묘지는 그 어떤 곳보다 좋은 쉼터였다.
 
삶을 들여다보면, 긴장과 이완의 리듬을 따라 흐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상의 속도를 늦추고 비워내지 못한다면, 쉬어야 할 때 쉴 줄 모른다면, 평화롭고 행복한 삶은 없다.
 
마음을 비우고 느릿느릿 살수록 몸과 마음은 편안해진다. 평화롭다. 물건, 재산을 소유하려는 욕망, 성공하고 출세하려는 욕심, 멋진 외관에 대한 집착과 같은 마음을 비우면, 배려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채울 빈자리를 얻게 된다. 비우면 채워진다. 미처 상상하지 못한, 더 놀라운 것들로 채워진다. 우리의 창의력과 상상력이 번득이는 순간도 바로 이 때일 것이다.
 
하지만 일상이 너무 바빠 휴식할 시간을 별도로 내기는 어렵다고 한탄할 수도 있다. 이때 웨인 멀러의 조언이 힘을 발휘할 것 같다. 핸드폰 벨 소리가 울릴 때, 횡단보도 앞에서 멈춰 서 있을 때, 문을 여닫기 위해 손잡이를 잡을 때, 먹고 마시기 전에도 얼마든지 잠시 멈춰 호흡을 고를 정도의 짬은 누구나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몇 초간의 이 짧은 휴식을 매순간 해낼 수 있는 사람은 편안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꾸릴 수 있을 것이다. 한번 해봐야겠다.
 
자연의 품 안에서    

▲ 레이첼 카슨의 책 <자연,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에코리브르, 2002)  
 
“(......) 과학자든 일반인이든 자연의 신비와 아름다움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삶의 고단함에 쉽게 지치지도, 사무치는 외로움에 쉽게 빠지지도 않는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라고 해서, 일상에서 분노하거나 걱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마음의 평안에 이르는 오솔길 하나를 간직하고 있다.”(레이첼 카슨 <자연,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 ‘영원한 치유’)
 
무엇보다도 우리는 자연의 품안에서 진정한 휴식을 맛볼 수 있다. 휴가철만 되면, 사람들이 너도나도 산으로, 바다로 달려가지 않는가. 하지만 굳이 산, 들, 강, 바다를 찾아 멀리 가지 않더라도, 걷다 잠깐 멈춰 서서 하늘을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마음은 편안해진다. 또 우리가 삶을 마감하고 죽음을 맞이할 때가 오면 자연은 우리를 넉넉하게 품어준다. 이처럼 자연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죽은 후에도 변함없이 진정한 안식처로 머물러 있다.
 
뿐만 아니라, 자연은 우리 삶에서 휴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는 스승이기도 하다. 밤과 낮, 계절의 변화, 생명체의 잠과 깨어남의 리듬 등. 우리는 자연리듬 밖에서 존재할 수 없다.
 
최고의 휴식인 잠을 생각해 보자. 푹 자고 일어나 상쾌한 아침을 맞이하려면, 아침에 충분한 햇볕을 쬐어야 한다고들 말한다. 우리 몸이 아침나절에 햇빛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밤에 멜라토닌이라는 호르몬을 충분히 분비하지 못한다고 하지 않는가. 이 호르몬은 우리를 깊은 잠으로 데리고 가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도록 돕는다고 한다.
 
결국 자연의 리듬을 존중할 때만이 휴식이 가능하고, 휴식 없는 자연 리듬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밖에는 다시 비가 내린다. 침묵한 채 가만히 빗소리에 귀를 기울여본다. 웨인 밀러의 말대로, 잠시 멈추어 쉴 수 있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평화로운 낙원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 잊지 말아야겠다. (이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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