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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고려대 의대생 성폭력’ 계기로 대책 요구 목소리  
 
십대 후반, 감기 기운이 있어 동네 내과를 찾았던 때의 일이다. 반백의 머리를 한 나이든 의사가 진찰을 위해 옷 속으로 청진기를 집어넣었다. 순간 나는 ‘악’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청진기와 함께 들어온 손이 내 가슴을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의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진찰하고 있었다. 그의 표정을 보자 ‘진찰 과정이 으레 이런 것인가’ 당황과 혼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얼마 후 다른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는 청진기를 옷 속으로 넣지 않고도 진찰을 했다. 물론 가슴을 쥐는 일 따윈 없었다. 그 때서야 분명히 깨달았다. 내가 지난 번 갔던 병원의 의사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던 거라는 사실을.
 
가슴을 잡혀 불쾌한 감정을 느끼고도 나는 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을까. 어린 나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환자로서 의사의 행위가 ‘진료행위인지 아닌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료인으로부터 진료 과정 중에 불쾌한 경험을 겪고, 비슷한 고민에 휩싸인 여성들이 많은 것 같다.
 
‘의료행위 중 성폭력 겪었다’ 상담사례 적지 않아
 

6월 10일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는 “의료행위 중 성폭력에 대한 적지 않은 상담 사례들이 접수되고 있다”고 밝혔다. 상담 사례는 ‘다른 의사에게서 비슷한 진료를 받았을 때에는 없던 행동이 유독 특정 의사에게서만 이루어졌다’, ‘이를 성폭력으로 볼 수 있는가’ 등의 내용이 주를 이룬다고 한다.

 
민우회 성폭력상담소에서는 상담을 요청한 여성들이 “진료 당시의 상황이나 의사의 권위에 위축되어 즉시 문제제기 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전했다. 이 때문에 의료행위 중 일어난 성폭력 범죄들이 가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환자 앞에 선 의사의 권위란 실로 막강하다. 환자의 직접적인 건강 문제를 다룰뿐더러, 일반인은 모르는 매우 전문적인 영역을 다룬다고 인식되기 때문이다. 미심쩍은 기분에 대해 설사 용기를 내어 묻는다고 해도, 의사가 ‘통상적인 진료 과정의 일부다’라고 말하면 환자 입장에서 뭐라고 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특히 성추행 현장에 피해자와 가해 의사 둘만 있는 경우는 더 어려운 상황이 된다. 성폭력상담소는 이런 경우 여성들은 “가해 의사가 발뺌을 할 때 피해 입증의 책임이 피해자에게 고스란히 전가될 것”을 우려한다고 지적했다.
 
무엇보다 여성들의 불안과 불신을 부채질하고 있는 것은, 성범죄를 저지른 의료인의 의료행위를 제재하는 수단이 마땅히 없다는 사실이다.
 
2007년 6월 경남 통영에서는 한 의사가 수면 내시경을 받으러 온 환자들을 마취시킨 뒤 성폭행해온 것이 발각돼 구속됐다. 이 의사는 항소심에서 징역 5년이 선고됐다. 의사협회는 성범죄를 저지른 의사의 회원 권리를 ‘3년 간’ 정지시켰다. 형이 만료되면 이 의사는 다른 지역에서 의료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안전하게 진료 받을 권리, 의료계는 예방책 마련해야
 
현행 의료법에는 성폭행을 저지른 의사의 면허를 박탈할 수 있는 조항이 없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고려대 의대생 성폭력 사건’을 통해, 이러한 제도적 허점의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민우회 성폭력상담소는 의료행위 중 발생하는 성폭력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특히 현재 의료법 개정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는 있지만, 개정안 역시 미흡한 부분이 있다고 지적했다. 결격 사유 추가 사항을 “진료 중 성범죄로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은 경우”로 한정하고 있어, 금고에 미치지 않는 형을 선고 받은 경우에는 가해 의사를 제재할 뾰족한 수가 없다는 점이다.
 
성폭력상담소 측은 무엇보다 ‘의료인 성폭력’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의료 행위를 빙자·악용한 성폭력 가해행위를 저지르지 않도록 사전 예방대책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의료계는 의사 앞에서 약자가 될 수밖에 없는 환자의 입장을 배려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의료 행위 중 발생할 수 있는 성폭력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는 것은, 환자들이 안전하게 진료 받을 권리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의료계는 그동안의 제 식구 감싸기 식 대처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예방책을 마련하는 일에 나서야 할 것이다.  (박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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