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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이경신의 도서관 나들이(43) 약에 얽힌 진실③ 
 
어떤 이의 질병을 치료하고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필요한 약이 다른 누군가의 건강과 목숨을 담보로 만들어진다면 어떨까? 소니아 샤는 <인체사냥>(마티, 2007)에서 거대 제약회사들이 신약 생산을 위해 사람들을 비윤리적인 인체실험에 동원하는 현실을 생생하게 폭로한다. 도대체 누가, 어떻게 희생되고 있는 것일까?
 
신뢰할 수 있는 약을 위해서라면
 
인류의 건강증진과 과학적 연구라는 아무리 그럴듯한 목적을 댄다고 하더라도, 실험대에서 생명을 빼앗긴 존재들은 항상 ‘약자’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인간을 살린다는 명분 아래 지금도 우리는 동물들에 대한 잔혹한 학대를 정당화하고 있다. 또 잘 사는 사람을 위해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인체실험에 동원해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서양 의학이 동물실험과 인체실험 덕택에 발전해 온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인체실험이 본격화된 것은 1940년대라고 한다. 인체실험의 사례는 넘쳐난다. 미국의 경우만 보더라도, 20세기 중반 남부도시에서 문맹인 가난한 흑인남성들을 매독생체실험에 동원했고, 죄수를 대상으로 한 말라리아 감염실험, 군인을 대상으로 한 가스실험, 불우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방사능실험, 정신지체아를 대상으로 한 소아마비실험을 벌였다. 물론 이런 비인간적인 실험이 미국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동안 사람을 대상으로 한 비윤리적인 실험을 막기 위해 법도 제정하고 윤리검열도 강화해 왔지만, 이 끔찍한 실험이 지금도 중단되지 않는 이유가 있다. 바로 신뢰할 수 있는 약을 생산하려는 욕심이 그것이다.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을 겨냥한 임상시험

▲   소니아 샤는 <인체사냥>(마티, 2007)

 
약이 연구, 개발되는 과정을 살펴보자. 우선, 병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아 병을 연구하는 데만 해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 병에 대한 연구에 이어 치료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이 개발의 단계에서 동물실험, 세포배양실험을 하는 ‘전임상시험’과 인체실험을 하는 ‘임상시험’을 한다.
 
그런데 1상부터 3상의 3단계를 거치는 임상시험 역시 수 년이 필요하다. 제 1상에서는 건강한 지원자에게 약을 투여해 부작용, 대사과정을 연구하면서 안전한 투약량을 결정하고, 제 2상에서는 해당 질병환자 수백 명을 대상으로 다양한 용량의 약을 투여해 효능의 단서를 찾고, 제 3상에서는 수백, 수만 명에 이르는 환자를 대상으로 약의 안정성, 효능을 평가한다.
 
여기서 병을 연구하는 과정은 주로 정부산하기관이나 대학에서 이루어지는데 반해, 거대제약회사는 임상시험에 관여한다. 가장 비용이 많이 드는 임상시험기간 동안, 약을 판매할 수 없고, 임상시험에 들어간 약의 90%가 미국식약청(FDA)의 승인을 얻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임상시험 지원자 모두가 약속을 지키는 것도 아니고, 의학적으로 적합한 피험자도 드물기 때문에 임상시험에 필요한 피험자를 구하는 일도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제약회사로서는 어떻게든지 임상시험에 드는 시간과 비용을 줄여 이익을 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해왔다.
 
피험자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TV, 라디오, 신문광고, 광고전단, 개인메일, 환우회 등을 총동원하고, 의사에게 사례금 주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부족한 지원자를 메우기 위해 제약업계는 자국민 가운데 가난한 사람을 주시했다. 아르바이트 대학생, 노숙자, 일용직 노동자와 같은, 생계유지가 힘든 사람들을 돈이나 물질적 보상으로 유혹해 온 것이다.
 
임상시험의 실체가 드러날수록, 소위 잘 사는 나라에서는 임상시험 참가자를 구하기가 더 힘들어졌다. 이에 다국적 제약회사는 1990년대 중반부터, 임상시험을 신속히 진행하기 위해 하청연구기관에게 떠넘기는 방법을 택했다. 임상시험을 위탁받은 자들은 피험자들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가난한 나라들로 눈을 돌린 것이다.
 
자유경제의 세계화 물결이 가난한 나라들을 거대제약회사의 이상적인 실험환경으로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은, 한편으로 채무국에게 공공보건, 의료서비스 삭감을 요구하고, 또 한편으로는 다국적 기업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수입개방을 요구했다.
 
그 때문에 중독성 강한 담배, 맥도날드와 같은 패스트푸드, 코카콜라와 같은 청량음료가 음식과 물이 부족한 나라에 밀려들어왔다. 영양이 불균형한, 고칼로리 음식들을 먹게 된 가난한 사람들은 당뇨, 심장질환, 폐질환, 고혈압 등과 같은, 부자 나라의 노년층 질병인 만성질환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제약회사가 원하는, 부자 나라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의약품의 임상시험에 더할 나위 없는 환경이 조성된 셈이다.
 
게다가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은 이상적인 피험자다. 이들은 의사에게도 더 고분고분하고, 의사가 조금이라도 관심과 친절을 보이면, 임상시험에 쉽게 동의하며 임상시험을 위한 공짜 약에 감격한다. 임상시험의 도중하차비율로 낮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들에게는 위험한 시술도 감행할 수 있다.
 
마침내 다국적 제약회사는 원하는 것을 얻은 셈이다. 기존의 약보다 더 나을 것도 없는 신약을 승인 받기 위해 꼭 필요한 위약대조시험이 손쉬운 장소, 다루기 쉬운 피험자를 찾아낸 것이다. 이제 임상시험 무대 -소니아 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체사냥’의 무대-는 동유럽의 폴란드나 러시아, 아시아의 중국이나 인도, 아프리카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과 같은 가난한 나라로 옮겨지고 있다.
 
“어차피 병들어 죽을 목숨, 무슨 문제냐?”
 
제약업계가 가난한 나라 사람들의 가난을 기업이익을 위해 이용한다고 보아도 무리는 없다. 기근이 심했던 케냐에서는 사람들이 끼니를 해결할 목적으로 임상시험에 참가하기도 했다. 또 잠비아에서는 에이즈에 걸린 자녀를 치료할 돈이 없는 부모들이 치료를 위해 어린 자녀들을 위약대조시험에 참가케 한 경우도 있었다. 문제는 이 부모들이 어린 자녀에게 위약이 처방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인도의 사례를 보더라도, 한 마을 전체의 여성들이 전임상 결과 종양위험이 우려된다고 판정된 피임주사약을 제공받았으면서도 자신들이 임상시험에 동원된 것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거기다 임상의가 수백 명의 인도여성들에게 태아에게 해로운, 승인되지 않은 항암제를 ‘생식력을 높이는 약’이라며 속여 제공한 일도 있었다.
 
환자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도움을 얻을 것이라 생각하고 임상시험에 참여하는데, 이처럼 정보를 제대로 제공받지 못하거나 임상의가 치료요법을 가장해 환자에게 이득이 되는 것처럼 속여서 사람들을 임상시험에 동원한다면, 명백히 비윤리적이다.
 
제약업계는 의약품 부작용의 위험 때문에 요구되는 윤리지침과 규제가 오히려 치료제 개발의 발목을 잡는다고 불평하지만, 실은 이윤추구에만 골몰하고, 연구자들은 환자치료보다 데이터에만 관심이 있다. 이들 앞에서 ‘뉘렌베르크 강령’, ‘헬싱키 선언’과 같은 의학 연구,실험 관련 윤리지침은 아무런 힘도 없다. ‘피험자에게 충분한 정보가 제공되어야 하고 자발적으로 동의해야 한다’고 아무리 말해 봐야 공허한 메아리로 울릴 뿐이다.
 
임상시험 업계는 오히려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을 당연시하고, 비록 피험자가 고통을 겪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이익이 된다면 괜찮다는 식의 논리를 내세운다. 부자에게는 허용될 수 없는 비윤리적인 것을 가난한 사람에게는 허용할 수 있다고 보는 윤리적 이중 잣대다. 가난해서 인체실험의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고려한다면, 이들의 논리가 가증스럽다.
 
거기다 한술 더 떠서 가난해서 약에 접근 못하는 사람들이라면, 어차피 제대로 치료받을 수 있는 형편도 아니고 병들어 죽을 목숨인데, 임상시험의 피험자가 되어 그나마 의약품 혜택을 볼 수 있다면 행운이고, 위약이 주어진다고 한들 무슨 문제가 되느냐며 반문한다. 임상시험 덕분에 가난한 나라의 병원에 첨단 기계와 설비가 들어서게 되니까, 오히려 이득이 아니냐는 것이다.
 
위약 군에 배정되어 치료를 받지 못해 죽는 것도 문제지만, 시험 단계의 약을 받는 것도 혜택이라 보긴 어렵다. 효능이 없는 약, 중독증상을 일으킬 수 있는 약에 노출될 수 있어, 위험부담이 크다. 3상 임상시험의 절반이 실패로 끝난다는 것을 기억하자.
 
임상시험은 치료의 혜택이 아니라는 것, 피험자 역시 실험대상일 뿐이라는 것은 임상시험이 끝난 후 약효가 인정되었을 때 제대로 확인할 수 있다. 약의 효력이 승인되는 순간부터 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는 약의 사용이 허락되지 않는다. 약의 수혜자는 따로 있는 것이다. 제약회사 측에서는 이들이 약을 제 때 먹지 못해 약의 효과를 과소평가토록 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약을 제공할 수 없다고 구차한 변명을 단다. 어떤 이들은 백인에게 효과 있는 약은 흑인에게 효과가 없다는 식의 인종차별적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사실 약이라면 소니야 샤의 지적대로, 이미 개발된 약만으로도 가난한 사람들 상당수를 치료하기에 충분하다. 빈곤국의 가난한 사람들의 건강문제는 신약이 없어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부자 나라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늘어난 것도 공중보건 덕분에 위생과 청결문제가 개선되면서라는 것쯤은 다들 알고 있다. 이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깨끗한 음식과 물, 위생적인 삶의 조건, 공중보건, 꼭 필요한 정도의 약이다. 하지만 거대제약회사들은 이들의 질병치료, 가난퇴치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다만, 이들의 가난과 가난으로 인한 질병을 이용해 돈 벌 궁리를 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처럼 약자를 희생시켜 얻은 비윤리적인 의약품이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다시 한 번 더 묻지 않을 수 없다. 약을 과소비하는 소비자 역시 ‘인체사냥’의 윤리적 책임에서 자유롭긴 어려울 것 같다. (이경신)

* 여성저널리스트들의 유쾌한 실험 <일다> 즐겨찾기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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